친구야, 내 대신 아내가 가는 것을 용서해 주게나

친구야, 내 대신 아내가 가는 것을 용서해 주게나

그리운 친구에게

아침에 출근하면서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네나. 가슴이 찡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지. 서울 쌍문동 "풀무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작가 이철환의 "축의금 만 삼천원"이란 글일쎄.

약 10여년전 자신의 결혼식에 절친한 친구가 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데 아기를 등에 업은 친구의 아내가 대신 참석하여 눈물을 글썽이면서 축의금 만 삼천원과 편지1통을 건네 주었다..

"친구야! 나대신 아내가 간다. 가난한 내 아내의 눈동자에 내 모습도 함께 담아 보낸다.
하루를 벌어야지 하루를 먹고 사는 리어카 사과장사가 이 좋은 날 너와 함께 할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사과를 팔지 않으면 아기가 오늘밤 분유를 굶어야 한다. 어제는 아침부터 밤12시까지 사과를 팔았다. 온종일 추위와 싸운 돈이 만 삼천원이다. 하지만 슬프지 않다. 나 지금 눈물을 글썽이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마음만은 너무 기쁘다. 개 밥그릇에 떠있는 별이 돈보다 더 아름다운 거라고 울먹이던 네 얼굴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아내 손에 사과 한봉지를 들려 보낸다. 지난밤 노란 백열등 아래서 제일로 예쁜 놈들만 골라냈다. 신혼여행가서 먹어라. 친구여~ 이 좋은 날 너와 함께 할수 없음을 마음 아파 해다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해남에서 친구가"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사과 하나를 꺼냈다. 씻지도 않은 사과를 나는 우적우적 씹어댔다. 왜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다 떨어진 신발을 신은 친구 아내가 마음 아파 할텐데.. 멀리서도 나를 보고 있을 친구가 가슴 아파 할까봐 나는 이를 사려 물었다.

하지만 참아도 참아도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참으면 참을수록 더 큰 소리로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어깨를 출렁이며 울어 버렸다. 사람들 오가는 예식장 로비 한가운데 서서...

지금은 해남에 사는 친구는 조그만 지방 읍내에서 "들꽃서점"을 하고 있고, 이철환작가는 아버지가 산동네에서 고물상을 하던 시절에 겪은 아름답고 눈믈겨웠던 실제 이야기를 담은 "행복한 고물상"이란 책을 냈습니다.


받은 글입니다.

힘겨운 나에게

힘겨운 나에게

삶은 격렬하고 정신없는 놀이다. 삶은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것, 위험을 감수하는 것,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중에서 -


요즘 제가 많이 지쳤거든요, 더워서 그런가. 20대가 되면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는데, 게으르고 힘겨운 나에게 다시 도전해 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요.


받은 글입니다. 윗글 쓰신 분이 20대에 쓰신 모양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때로는 무척 힘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외부적인 상황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유없이 힘들어 지칠 때도 있습니다. 위 제목을 보고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특히 지금 힘겨워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재충전을 하고 싶지만 여의치 않은 많은 분들. 모두 힘내시기를 빕니다.

Calendula officinalis, Fryšták


Calendula officinalis, Fryšták


DescriptionČeština: Měsíček lékařský (Calendula officinalis), Fryšták
English: Pot marigold Fragaria, Fryšták
Date16 August 2011, 14:20:44
SourceOwn work
AuthorThis image is a work by Pavel Ševela (sevela.p).
When reusing, please credit me as: Pavel Ševela / Wikimedia Commons.
LicensingThis file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3.0 Unported license.
Attribution: Pavel Ševela


From Pavel Ševela / Wikimedia Commons

어느 애처가의 호소

어느 애처가의 호소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1835년 헬리 혜성이 빛나는 밤에 태어났다. 언젠가 그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헬리 혜성과 함께 태어났기 때문에, 다시 헬리 혜성이 나타나면 그때 같이 사라질 거야. 정말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혜성과도 같은 존재야.”

마크 트웨인은 소문난 애처가였다. 마치 혜성처럼 나타난 올리비아에게 처음 운명과도 같은 사랑을 느꼈고, 그녀와 결혼하여 평생을 같이 살았다.

나이 32세 때 마크 트웨인은 유럽 여행 관광선에서 찰스 랭던이라는 청년을 알게 되었다. 당시 랭던은 자신이 묵고 있던 선실 벽에 누이 올리비아의 사진을 걸어놓고 있었는데, 트웨인은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다.

사진 속의 올리비아 눈은 유난히 반짝였으며, 그 순간 혜성처럼 마크 트웨인의 머리를 스친 것은 ‘운명’이라는 단어였다.

“이 여자야말로 내가 그리던 여성상이다!”

마크 트웨인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마크 트웨인은 찰스 랭던의 집 만찬에 초대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올리비아를 만날 수 있었다. 역시 사진 속에서 보던 그 얼굴은 아름다웠으며, 그는 운명의 여신에게 이끌리듯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처음 만나서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생각되더라도 처음 만나서 사랑을 고백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찬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탔다가 일부러 굴러 떨어지는 연극을 벌였다. 땅에 떨어진 그는 기절한 척하였다.

전송을 나왔던 찰스 랭던은 얼른 마크 트웨인을 안아서 집안으로 옮겨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2주 동안 마크 트웨인은 환자 행세를 하며 랭던의 누이인 올리비아의 병간호를 받았다.

마크 트웨인의 연극은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그는 올리비아가 간병을 하러 방으로 들어올 때마다 끈질기게 프러포즈를 하였다. 17번째의 프러포즈에 그는 마침내 성공하여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선 딸만 세 명이 태어났다. 아들이 없었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을 행복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올리비아는 어느 날 얼음판에서 넘어져 반신불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의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은 그런 불구의 몸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처음 만날 때처럼 평생 아내를 사랑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죽기 2년 전부터는 침대에만 누워서 살았는데, 그는 아내의 병상을 지키며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나는 처음 만날 때부터 오늘까지 올리비아, 당신을 단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어!”

병상에 오래 누워 있게 되자 올리비아는 신경이 예민해져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낮에도 새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못자는 것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창문 밖의 나무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서서 붙였다.

‘새들아, 제발 울지 말아다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자고 있단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이 70세가 되던 어느 날, 올리비아는 세상을 떠났다. 아내만이 아니라 거의 같은 시기에 장녀 수지까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셋째딸 제인까지 간질로 목숨을 잃었다.

마크 트웨인 곁에는 이제 둘째딸만 남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셋째딸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그는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어 병상에 눕고 말았다.

1910년 4월 21일, 마크 트웨인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으나 이내 눈을 감고 말았다. 가는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그날 밤 별이 뜰 무렵, 그는 번쩍 눈을 뜨고 곁에서 병간호를 하고 있던 둘째딸 클라라의 손을 잡았다.

“클라라야, 안녕! 우린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마크 트웨인은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하였다. 그날 밤 헬리 혜성이 나타났고,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그는 정말로 75년 전 헬리 혜성과 함께 태어나, 다시 헬리 혜성이 나타나던 날 저 세상으로 떠난 것이었다.

이렇게 마크 트웨인은 이 세상을 마치 별처럼 살다간 사람이다. 병상의 아내를 잠들게 하기 위하여 새들에게 울지 말아달라고 호소하는 그의 마음은, 새벽녘 서쪽 하늘로 아스라이 스러져가는 별빛처럼 애처롭기까지 하다.

[유머] 중국의 유태인 (Chinese Jews)

'시드'와 '앨' 두 사람이 중국식당에 앉아있었다. 앨이 시드에게 물었다. "중국에 유대인들(Jews)이 있나?"

시드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웨이터에게 물어보자구" 웨이터가 다가왔을때 앨이 그에게 물었다. "중국에 유대인(Chinese Jews)이 있나요?"

웨이터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그리곤 그는 취사장으로 들어갔다. 몇분후 그는 되돌아와 말했다. "없습니다. 중국에 유대인(Chinese Jews)은 없습니다."

앨이 물었다. "정말이요?"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웨이터가 대답하고 취사장으로 되돌아갔다. 웨이터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때 시드가 말했다. "중국에 유대인이 없다는게 믿어지지 않는군. 우리 유대인은 세계 어디에나 흩어져 있는데."

웨이터가 되돌아와서 말했다. "없습니다. 선생님, 중국에 유태인(Chinese Jews)은 없습니다."

앨이 다시 물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요? 중국에 유대인(Chinese Jews)이 없다는게 믿어지지 않네요"

웨이터는 화난투로 대답했다. "선생님, 제가 다 물어보았습니다. 우리 식당엔 오렌지쥬스, 자두쥬스, 토마토쥬스, 포도쥬스는 다 있는데 차이니즈 쥬스는 없습니다."

하늘을 가진 손

하늘을 가진 손

보리 한 줌 움켜쥔 이는 쌀가마를 들 수 없고,
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
성자가 빈 손을 들고, 새들이 곳간을 짓지 않는 건
천하를 다 가지려 함이다.
설령 천하에 도둑이 든들
천하를 훔쳐다 숨길 곳간이 따로 있겠는가?
평생 움켜쥔 주먹 펴는 걸 보니
저이는 이제 늙어서 새로 젊어질 때가 되었구나.

- 반칠환의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중에서 -


받은 글입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죽음과 마주하는 법

죽음과 마주하는 법

◀ 김스텔라 서울 모현가정호스피스 수녀

어린 손자들은 할머니 손과 발을 어른들은 얼굴과 몸을 닦았다.
할머니와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이 같은 사랑의 행위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게 또 있을까.
우리는 죽음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단지 시간이 달라서 아직 먼 것처럼 느끼지만…

그 할머니를 만난 것은, 통증이 너무 심하자 할머니의 아들이 다급한 마음에 가정호스피스를 찾아 우리에게 연락했기 때문이다. 통상 서너달 진단을 받은 말기암 환자들에게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간호를 하는 게 가정호스피스 역할이다.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며 하얀 천으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발가락 사이사이에도 동여매고 있었다.
“할머니, 머리는 왜 그러고 계셔요?”
“머리를 꽁꽁 묶어 놓으면 머리가 안 아프거든.”

할머니는 암 말기로 더 이상 병원에서 해 줄 게 없다고 해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중환자실에 가서 치렁치렁 고무호스와 줄을 매달고 있느니 집에서 조용히 임종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통증 때문에 너무 고통을 겪어 아프지 않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할머니께 진통제를 드리자 통증은 조절되기 시작했고, 구역질과 구토 문제도 해결돼 식사도 제대로 하게 됐다.

그렇다고 죽음의 두려움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집안에 혼자 계셔야 할 때가 많아 오히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하루는 밤늦게 통증이 심하다고 해 집으로 방문하자, 할머니는 “사람도 아녀”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할머니는 갑자기 목소리가 살아나더니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와 같다”고 했다.

할머니의 이런 말씀을 듣는 순간, ‘아! 이게 바로 우리 삶이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할머니는 아프고 힘들 때 누군가가 늘 함께 있어 주기를 원했던 거였다. 신체적인 통증만 아니라 정신적 통증을 더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늦은 시간에도 집으로 급하게 달려오는 우리를 보고 할머니는 편안해했다. 환자를 돌보는 것은 우리의 시간에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그렇게 4개월여를 보낸 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손자들도 모여 있었다. “지금 할머니는 여행을 떠나실 준비를 하고 계시니 손자들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의 권유에 아이들이 한명씩 할머니에게 다가가 “이젠 아프지 마세요.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사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말할 힘조차 없는 할머니는 눈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얼굴은 금세 평안해졌고 가족들도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할머니에게 새 옷을 입히기 위해선 목욕을 시켜드리시죠”고 하자, 어린 손자들은 할머니의 손과 발을 씻겼고, 어른들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여윈 몸을 닦았다. 할머니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세상을 떠나려는 사람과 이 같은 사랑의 행위처럼 숭고하고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할머니는 비록 한마디도 못하고 숨 쉴 힘조차 없는 상황이 됐지만 얼굴 표정으로, 눈 한번 맞추는 것으로 가족들의 사랑을 확인하였다. 온 가족이 모여서 할머니와 지낸 옛날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할머니의 장례식과 유언에 대해 말했다. 자기의 유언대로 가족들이 해 줄지 염려하는 환자들이 많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그런 얘기를 하면 환자들은 되레 차분해지면서 위로를 받는다. 할머니는 그날 자신의 소원대로 온 가족이 둘러앉은 가운데 어둠을 잘 헤치시고 빛을 향해 웃으며 가시지 않았을까.

나는 이 가정을 보면서 우리는 죽음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집에서 돌아가시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병원에서 임종해 죽음을 접할 기회가 적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임종을 지키게 할 것이냐를 놓고 물어보면 대부분 가정들은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녀들이 받게 될 상실감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방암 말기인 38살 엄마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친척들은 “아이들에게 아픈 엄마의 나쁜 기억을 보여주는 게 좋지 않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은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만큼 엄마가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설득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마지막 인사를 하도록 했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제일 큰 녀석이 엄마에게 “이젠 아프지 말라”고 말하면서 엄마 품에 한참 동안 안겼고, 자기 한 몸 가누기조차 힘든 엄마도 그렇게 아이를 안았다. 둘째도 엄마에게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했고 6살짜리 막내가 “엄마 잘 가”라며 아픈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소리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어린 자녀 셋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엄마는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아이들을 보며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였다. 그렇게 가족과 인사를 한 아이 엄마는 그날 밤 숨을 거뒀다.

장례를 치른 뒤 아이들의 아빠가 나를 찾아왔다. “아이들이 엄마의 죽음을 못 봤다면 아마 엄마 이야기는 우리 집에선 말도 꺼내지 못했을 거예요. 온 가족들이 모두 그런 어려움을 함께 겪었기 때문에 지금은 서로 엄마의 빈 공간을 채우려고 노력해요. 아이들이 나보고도 오히려 힘내라고 하니….”

어른들의 염려와 다르게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통해 죽음이 아주 캄캄하고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에겐 죽음을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생각한다면,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로 남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단지 시간이 달라서 마치 나에게는 아직도 먼 것처럼 느끼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태아가 열달 동안 엄마 뱃속에서 엄마와 함께 살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죽어서 가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기에 마치 태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받은 글 입니다.

실험미술공간이 된 옛 여관

실험미술공간이 된 옛 여관

80년 가까이 지친 나그네를 받던 곳. 낡고, 청와대 앞이라는 이유로 헐릴 뻔한 곳이 이제는 여관간판 그대로를 달고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손님들을 받는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보안여관이 그곳이다. 이곳은 미당 서정주 시인이 1936년 머물며 김동리, 김달진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2004년까지 영업을 하고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2009년 모 아트서비스대표가 작품과 퍼포먼스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일상그대로의 모습으로 가도 정겨이 반겨주는 곳. 그곳에서는 누구나 문화예술의 귀한 손님이 된다.

오래된 것은 서둘러 부수거나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우리들에게 이 실험공간은 옛것을 지키면서도 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 최선옥 시인


사색의향기님(culppy@culppy.org)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신용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신용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한 번 금이 가면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다. - 아미엘 -

책만 믿는다면...

책만 믿는다면 책 없는 것과 같다. - 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