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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ries: 영원한 노래

Sundries: 영원한 노래

손이 터서 쓰리면 나는 어머니에게 갔다. 그러면 어머니는 꼭 젖을 짜서 발라 주었다. 젖꼭지 가까이에 손바닥을 대면 어머니는 쪼르륵 쪼르륵 짜주었다. 젖이 많을 때는 주사기에서 나올 때처럼 찍찍 나왔다. 젖이 적을 때는 한 방울씩 똑똑 떨어져 손바닥에 고였다. 그 새하얀 젖을 손등에다 발랐다. 그러면 당장은 쓰렸지만 손은 금방 보드라와졌다.

- 김용택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중에서

지금도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아플 때 나보다 더 아파 하시며 우시던 어머니! 넘어져 머리가 깨졌을 때 된장 발라주시던 어머니! 아이들과 싸웠을 때 부지깽이로 때리시던 어머니! 겨울에 손이 터지면 젖을 짜 발라 주시던 어머니! 지금도 아플 때 "엄마"하고 부를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영원한 노래입니다.

안녕하세요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Sundries: 영원한 노래'에서 옮긴 글입니다.

어머니....

어릴 적에는 그 한 마디 만으로도 평화와 위안을 찾고, 커서는 그 한 마디에 찌릿한 그리움에 젖게 되는 단어.

어머니 우리 어머니 !

어머니 우리 어머니 !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하시고는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삼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글 속의 “어머니”는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가 되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 동덕여대 아동학과 교수 우남희 -


받은 글입니다.

Sundries: 고향집 어머니

Sundries: 고향집 어머니

어머니는 언제나 하늘을 이고
긴 밭고랑 김을 메시며 기도를 한다

급행열차도 서지 않는 산골마을 토담집에서
도시로 나간 큰 자식,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전히 어머니 안에 살고 있는 어린 아이로
금방이라도 들릴 것 같은 웃음소리에
기다림의 행복으로 살고 계신다

곡식이 익어 가는 계절의 소리
해질녘 돌아오는 작은 발소리
흙냄새 베어있는 어머니 모습
깊은 물 소리 없이 흐르듯
어머니 깊은 마음은 자연만큼 편안하다

- 권영분의 시 《어머니》(전문)에서 -


어머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머니 품속에서만큼은 언제나 어린아이입니다. 고향집 어귀에 들어설때면 언제나 맨발로 달려나와 두꺼워진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어 주시는 내 어머니. 어머니 계신 곳이 내 고향이고,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입니다


'Sundries: 고향집 어머니'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

▶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 ◀


아들아!

결혼할때 부모 모시는 여자 택하지 말아라. 너는 엄마랑 살고 싶겠지만, 엄마는 이제 너를 벗어나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 살고 싶단다. 엄마한테 효도하는 며느리를 원하지 말아라. 네 효도는 너 잘사는 걸로 족하거늘

네 아내가 엄마 흉을 보거든 네 속상한 거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걸 엄마한테 옮기지 말아라. 엄마도 사람인데 알고 기분 좋겠느냐. 모르는 게 약이란 걸 백번 곱씹고 엄마한테 옮기지 말아라.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널 배고 낳고 키우느라 평생을 바쳤거늘 널 위해선 당장 죽어도 서운한 게 없겠거늘.... 네 아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조금은 이해하거라. 너도 네 장모를 위해서 네 엄마만큼 아니지 않겠니?

혹시 어미가 가난하고 약해지거든 조금은 보태주거라. 널 위해 평생 바친 엄마이지 않느냐. 그것은 아들의 도리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독거노인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미가 가난하고 약해지는데 자식인 네가 돌보지 않는다면, 어미는 얼마나 서럽겠느냐. 널 위해 희생했다 생각지는 않지만,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은 들지 않겠니?

아들아!

명절이나 어미 애비 생일은 좀 챙겨주면 안되겠니? 네 생일 여태까지 한번도 잊은 적 없이 그날 되면 배 아파 낳은 그대로 그 때 그 느낌 그대로 꿈엔들 잊은적 없는데 네 아내 에게 떠밀지 말고 네가 챙겨주면 안되겠니? 받고 싶은 욕심이 아니라, 잊혀지고 싶지 않은 어미의 욕심이란다.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름만 불러도 눈물 아렷한 아들아!

네 아내가 이 어미에게 효도하길 바란다면, 네가 먼저 네 장모에게 잘하려므나. 네가 고른 아내라면 너의 고마움을 알고 내게도 잘하지 않겠니? 난 내 아들의 안목을 믿는다.

딸랑이 흔들면 까르르 웃던 내 아들아!

가슴에 속속들이 스며드는 내 아들아!

그런데 네 여동생 그 애도 언젠가 시집을 가겠지. 그러면 네 아내와 같은 위치가 되지 않겠니? 항상 네 아내를 네 여동생과 비교해 보거라. 네 여동생이 힘들면 네 아내도 힘든 거란다.

내 아들아! 내 피눈물 같은 내 아들아!

내 행복이 네 행복이 아니라 네 행복이 내 행복이거늘 혹여, 나 때문에 너희 가정에 해가 되거든 나를 잊어다오. 그건 에미의 모정이란다. 너를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어미인데, 너의 행복을 위해 무엇인들 아깝지 않으리. 물론 서운하겠지, 힘들겠지, 그러나 죽음보다 힘들랴.

그러나 아들아!

네가 가정을 이룬 후 에미 애비를 이용하지는 말아다오. 평생 너희 행복을 위해 바쳐 온 부모다.. 이제는 에미 애비가 좀 편안히 살아도 되지 않겠니? 너희 힘든건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다오. 늙은 어미 애비 이제 좀 쉬면서 삶을 마감하게 해다오.

너의 에미 애비도 부족하게 살면서 힘들게 산 인생이다. 그러니 너희 힘든거 너희들이 헤쳐 가다오. 다소 늙은 어미 애비가 너희 기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건 살아오면서 미처 따라가지 못한 삶의 시간이란 걸 너희도 좀 이해해다오.

우리도 여태 너희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니 너희도 우리를 조금, 조금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 안되겠니? 잔소리 가치관 너희들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헐리렴... 우린 그걸 모른단다. 모르는게 약이란다.

아들아!

우리가 원하는건 너희의 행복이란다. 그러나 너희도 늙은 어미 아비의 행복을 침해하지 말아다오. 손자 길러 달라는 말 하지 말아라. 너 보다 더 귀하고 이쁜 손자지만, 매일 보고 싶은 손주들이지만, 늙어가는 나는 내 인생도 중요하더구나. 강요하거나 은근히 말하지 말아라.


날 나쁜 시에미로 몰지 말아라. 내가 널 온전히 길러 목숨마저 아깝지 않듯이, 너도 네 자식 온전히 길러 사랑을 느끼거라. 아들아 사랑한다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그러나 목숨을 바치지 않을 정도에서는 내 인생도 중요하구나.


받은 글입니다.


어머니도 여자란다.

어머니도 여자란다.

칠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일찍 혼자 되어 육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젊어서부터 고생을 해서 얼굴에는 주름이 깊고 아픈 곳도 많으시지요. 15년전에 자궁암 수술을 받으셨는데 지난해 또 다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전날, 담당의사를 만나 수술 동의서를 서명했습니다. 의사는 수술자국을 봉합할 때, 실로 꿰매는 방법과 흉터가 덜 남는 인체용 접착제로 붙이는 방법 중에 처방은 제일 좋은 것으로 해 달라고 했지만 수술 자국 봉합하는거야 별 차이가 있겠나 싶어 가격이 싼 실을 선택했습니다. 수술비를 책임지는 오빠의 부담을 줄여 보자는 생각에서였지요.

절차를 마친 뒤 오빠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수술은 이렇게 진행되고, 약 처방은 좋은 것으로 하기로 했으며 실로 꿰매기로 했다고요.

그러자 묵묵히 제 말을 듣고 있던 오빠가 말했습니다.

" 현경아~! 아무리 늙고 병드신 몸이지만 엄마도 여자란다. 자궁 수술 받으신 흉터도 남았는데 이번에 또 상처가 생기면... 나 너무 속상할 것 같다. 돈이 더 들더라도 자국이 덜 남는 방법으로 하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같은 여자인 딸조차 늙으신 엄마가 여자라는 걸 잊어 버렸는데, 오빠는 거기까지 마음이 닿아 있었던 것입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회복실에서, 오빠는 붕대가 친친 감긴 어머니의 배를 보고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이세상 떠나실 때까지 몸에 아픈 상처 없이 살게 해드리고 싶다는 오빠. 아마도 어머니는 당신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오빠가 있어 그 동안 고생이 하나도 아깝지 않으실 겁니다.


받은 글입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 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덕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받은 글입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글이 아닐까 생각되어 올려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모 중학교 급식소 청소아줌마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들고 갔습니다. 한달 급여가 50~60만원인데, 4대 보험에 가입해야하고 세금도 뗀다는 말에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하고 돌아서 나왔습니다.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되는 아들 녀석이랑 7월이면 세 돌이 되는 딸의 어린이집비만 내면 남는 게 없겠더라구요. 시부모님 연세가 많으셔서 농사지으시기도 힘드시고, 매달 용 돈도 보내 드려야 하고, 애들은 왜 그리 먹고 싶은 게 많은지...

답답한 가슴을 안고 집으로 들어서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엄마가 며칠 전에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는 큰 언니의 전화였습니다. 온 몸에 힘이 빠집니다.

며칠동안 안부 전화도 못 드린 제가 한심합니다. 남편이 퇴근을 해서 괜한 짜증을 냅니다. 서러움이 복받쳐 이불을 뒤 집어 쓰고 누웠는데, 이런 저런 생각이 스칩니다.

결혼하고 3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가 저희 집에 오셨을 때, 둘째를 임신한 저는 먼 길 오시느라 힘드실 텐데 제가 먹고 싶은 것만 만들어 달라고 하고, 엄마가 가실 때 차비 한 푼 못 드리고...... 첫아이 출산 때도 밤새 한잠 못 주무시고, 애 낳은 못난 딸 한 달 동안 몸조리 해주시느라 낮에 벼 베시고 밤엔 잠을 설치시더니, 결국 앓아 누우셨죠.

엄마 생일이었었는데....... 제가 결혼 한지 이제 6년, 부모님 생신이 시부모님 생신과 보름 간격이어서 한번도 못 찾아뵙고, 늘 걱정만 끼쳐드리고.... 시댁에서 자가용으로 20분이면 가는 거리인데도 시댁에만 갔다가 전화통화만 하고 올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면 "시부모님 연세가 많으시니까 니가 잘 해야한다. 여기 올 시간 있으면 시댁에 그만큼 더 있다가 가거라."하십니다. 시어머님 입원하셨을 땐 큰애 손잡고, 작은애 젖 먹여 가며 새벽 첫차로 달려갔건만, 우리엄만 입원한지 며칠이 되어서야 겨우 알았는데도 그냥 밥 먹을 것 다 먹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있습니다.

자기 엄마가 입원하셨으면 난리가 났을 사위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찰거머리처럼 엄마 옆에 붙어서 자는 두 아이를 재우고 나서야 눈물이 납니다. 달래는 남편이 괜 시리 미워 더 큰소리로 울어 봅니다.

"두고 봐라! 다음 세상엔 꼭 남자로 태어 날거다. 내 부모 생신도 꼭 챙기고 용돈도 드리고 여행도 시켜 드리고, 꼭 그럴 거라구...."

엄마! 미안해. 마음은 엄마 옆에 있는 거 알지? 이번 엄마 환갑잔치 때는 꼭 갈게.

엄마 힘내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바랄게요.

사랑해요. 우리엄마! 우리엄마!

(MBC 감동 글 중에서 )


- - 어머니 - -

노래 : 최진희

마음 하나 편할 때는 가끔씩은 잊었다가
괴롭고 서러울 땐 생각나는 어머니

지난 여름 정든 고향 개울가에서
어머님을 등에 업고 징검다리 건널 때

너무나도 가벼워서 서러웠던 내 마음
아직도 나는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젖줄 떠나 자란 키는 당신보다 크지만
지금도 내 마음은 그 팔 베개 그립니다.

내 팔 베개 의지하신 야윈 얼굴에
야속하게 흘러버린 그 세월이 무정해

어머님이 아실까봐 소리 없이 울었네.
지금도 그 한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받은 글입니다.

어머니를 안아드린 것이 언제였나요?

어머니를 안아드린 것이 언제였나요?

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것이 언제였나요?
어머니를 안아드린 것이 언제였나요?
오래전에 우리가 받았던 것을 돌려드릴 때입니다.
손톱을 깎아드리고, 발을 씻겨드리고, 등을 밀어드리고,
어깨를 주물러드리세요.
어머니 등 뒤에서 살짝 안아보세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이
서로의 가슴에 물결칠 것입니다.

- 고도원의《부모님 살아계실 때 꼭 해드려야 할 45가지》중에서 -


때를 기다리면 못합니다. 다음에 해 드려야지, 하면 늦습니다.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그 마음 그대로 가지고하면 됩니다. 일상처럼, 습관처럼, 버릇처럼 많이 만져드리고 많이 안아드리는 것이 사랑이며 행복이고 진짜 효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