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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신발

어느 초원을 누비던 우공(牛公)인가. 제 살과 장기를 모두 내주고 무두질한 수많은 길을 이끌고 내게 찾아온 것들. 그들을 코뚜레에 꿰어 야전으로, 도시의 아스팔트로 끌고 다녔다. 우렁우렁 깊은 눈, 슬픔도 잠시 말뚝에 매어두고 주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이끌려간 것들. 반항은 금물, 복종만이 그들이 살길이었다. 주인에게, 아니, 주인의 또 다른 상전에게 수없이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 최장순, 수필 '신발' 중에서 -

제 몸을 모두 내주고 무두질한 가죽으로 내게 온 신발, 구두. 그처럼 우직한 충신이 있을까요. 코뚜레에 꿰인 채 가는 길을 안내한 우공. 우렁우렁 깊은 눈은 복종만이 최고의 덕목. 낡았거나 유행에 뒤졌다는 이유로 헌신짝 취급한 그것들에게 잠시 미안한 시간입니다.


사색의향기님(culppy@culppy.org)께서

봄은 고양이처럼 온다

봄은 고양이처럼 온다

살금살금 다가오는 봄. 다가와 약간의 경계이듯, 호기심이듯 눈망울을 굴리다가 언제 가는지 모르게 계절의 모퉁이를 돌아가는 봄. 봄은 그래서 고양이 같다.

봄은 변화무쌍하다.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사람의 감정과도 같아서 속을 알 수 없어 불안하기도 하지만, 가닥이 잡힐 듯 말 듯한 감정의 숨결은 미묘해서 신비롭기도 하다. 봄은 팝콘 같은 꽃망울을 탁탁 터뜨려놓다가도, 무슨 심술인지 저만치 멀어진 동장군을 불러 세워 때 아닌 눈을 선보이기도 한다. 겨울 같은 봄과 여름 같은 봄의 사이에서 나는 생각한다. 이 팜므파탈의 봄, 치명적인 봄은 어린 고양이 눈빛으로, 갸르릉 거리는 소리로 나를 유혹한다고.

- 최장순, 수필 '봄은 고양이처럼 온다' 부분 -

묵은 입맛이 봄앓이를 하고 두툼한 옷을 벗고 서둘러 외출하고 싶은 봄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겨울 같은 봄이 시샘을 합니다. 고양이처럼, 호기심으로 예민함으로 다가오는 봄입니다. 곧 꽃망울 툭툭 벌어지면 설렘도 그만큼 커지겠지요.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일어서는 아름다운 봄입니다.


From 사색의향기님(culppy@culppy.org)


12월의 강가에서

12월의 강가에서

나비처럼 눈이 내리고 있다.
이런 날은 어디론가 달려가야만 한다.
차창을 부드럽게 껴안는 가벼운 눈송이와 어울릴
를 들으면서.

겨울강변에는 잔설처럼 보이는 물억새가 하얀 손을 흔들며
말없이 흐르는 강물에 작별을 고하고,
산이 제 얼굴을 내려다보는 물가엔 작은 새들이
부산한 몸짓으로 강을 간질이고 있다.
강이 꽝꽝 문을 닫기 전에
부지런히 제 흔적들을 새겨놓기라도 하려는 듯.

자연에 순응하며 유연하게 흘러가는 물은 그대로 음악이 된다.
이미 정해진 순서와 속도에 따라 열두 곡은 반복해 흐르지만,
흘러간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흘러가버리는 것을 붙잡으려 들지 말라!'
강물이 타이르는 소리를 듣는다.

- 최장순, 수필 '12월의 강가에서' 중에서 -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상과 함께 역시 바삐 달려온 해입니다. 이제 차분히 지나온 길을 더듬어볼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좋은 일도, 부족했던 일도, 아쉬운 일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감사할 뿐입니다.


사색의향기님(culppy@culppy.org)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젓가락 (최장순)

젓가락

사랑해, 말할 때
웃음으로 발끝모아 보내는 인사
당신이 필요해, 말할 때
네 저도요, 까치발 들어 보내는 입맞춤

싱거운 세상 한술에
짭짜름하게 간을 맞추는 재치
차갑거나 따뜻하거나 단단하거나 부드럽거나
세상 닿는 대로 받아들이는 아량
마음 이리저리 헤집지 않고
속을 보자고 아프게 찌르지도 않으며
둘이 하나인 듯 같은 곳을 바라보는 긴 호흡

산다는 건 그런 것이지

- 최장순, '젓가락' -


아프게 마음 헤집거나 찌르지 않고 하나 되어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삶. 그것이 너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우리가 어울려가는 방식입니다. 젓가락처럼.


사색의향기님(culppy@culppy.org)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