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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착한 사람이다.

나는 원래 착한 사람이다.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 입니다.
인간에게는 남의 불행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굶어서 고통 받는 저개발 국가 어린이의 굶주린 사진을 보고 가슴이 찡해지는 것이나, 고통에 빠져 절망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착한 본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요, 맹자는 이런 인간의 마음을 불인지심(不忍之心)이라고 합니다.

아니 불(不)자에 참을 인(忍)자, 그러니까 ‘불인지심’은 인간으로서 남의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하는 선한 마음입니다.
맹자는 비유를 통해 이렇게 불인지심을 설명합니다.
‘지금 어린 아이가 내 눈앞에서 우물 속으로 빠지려 하고 있다.
이 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측은(惻隱)한 마음이 들어 손을 뻗혀 그 아이를 구해주려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속으로 그 아이의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동네 친구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아울러 내가 손을 뻗혀 구해 주지 않았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욕먹을까 두려워해서도 아니다.
이것이 인간은 누구나 남의 불행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본능적인 불인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此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맹자의 이 예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그 본성은 본래 착하다는 믿음 입니다.

맹자의 이 불인지심은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착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그의 성선설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초입니다.
인간은 불인지심이 있기에 본성이 착하다는 것인데요, 우리가 여기서 맹자의 성선설이 옳든 그르든 그것을 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굶어죽고 전쟁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 당시 지도자들에게‘불인지심’을 가지고‘백성들의 고통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정치’를 하라는 강력한 일갈을 외쳤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이 내 잘못인가? 세월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라며 자신의 책임을 발뺌하는 지도자들에게‘당신은 저 힘들고 불상한 백성들을 보면 불인지심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 마음을 확충하여 백성들을 위한 불인지정(不忍之政)을 펼치라’고 맹자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인지정(不忍之政)’! 백성들의 불행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군주의 이상적인 정치입니다.

맹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나는 착한 본성, 인의에지가 있다고 합니다.
남의 불행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측은지심이 仁의 단서이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수오지심이 義의 단서이며, 사양할 줄 아는 사양지심이 禮의 단서이며, 옳고 그른 것을 가릴 줄 아는 시비지심이 智의 단서라는 것입니다.

맹자의 정치적 이상은 바로 국부를 늘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들이 배부르게 살 수 있는 정치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의 정치, 왕도(王道)정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일정한 직업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항산(恒産)이라고 한다. 항산이 있어야 물질적 안정이 이루어진다. 이 물질적 토대가 없다면 항심(恒心) 역시 없다.

항심은 도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 안정이다.
만약에 백성들에게 이 항심이 없다면 그들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백성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정치를 해 놓고 그것을 국가가 법률로 구속한다면 이것은 백성들에게 그물을 쳐놓고 그 그물에 걸려들게 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다. 어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백성들을 그물질 하려 하는가?’ 맹자의 이런 주장 속에는 잘 먹고 잘살게 하는 정치야말로 가장 위대한 정치이며 그런 정치의 시작은 ‘불인지심’에서 시작된다고 본 것입니다.

여러분!
맹자에 의하면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의 불행을 차마두고 보지 못하는 불인지심이 있어야 한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란 정의는 정말 오래된 진실인 것 같습니다.


넷향기(http://www.nethyangki.net/)에서 옮긴 글입니다.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란 말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자신은 남보다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거기서 거기, 즉 별로 차이가 안 난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요, 부모가 되어서든, 직장 상사가 되어서든 이 정도면 나는 잘한다고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대체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왜 자식들이 내 마음을 안 알아주는 것일까?
세상에 나정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사람들은 나를 멀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맹자>의 오십보백보이론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맹자가 살던 시대에 양혜왕(梁惠王)이란 지도자가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백성들에게 정치를 하고 있소. 하내(河內) 지방에 흉년이 들면 젊은 사람은 하동(河東)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고, 거동 못하는 늙은이와 아이들을 위해서는 하동에서 곡식을 가져다가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동에 기근이 들어도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오.

그러나 이웃나라 지도자가 정치하는 것을 살펴보니 나 같이 백성들에게 마음을 쓰는 자가 없는 것 같소.
그런데 도대체 이웃 나라의 백성들은 줄어들지 않고, 우리나라 백성들 또한 많아지지 않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양혜왕이 맹자에게 자문을 구한 내용입니다. 세금을 내고 부역을 담당하던 백성의 숫자가 국력이었던 시절, 양혜왕은 어째서 백성들이 자신의 나라로 몰려들지 않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왜 민심이 자기에게 쏠리지 않는지를 궁금해 했던 것인데요,
최선을 다해서 백성들을 위하여 정치를 하는데 왜 백성들이 나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느냐는 왕의 질문에 맹자는 오십보백보 이론으로 대답합니다. "왕께서는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비유해서 말씀드리지요.

전쟁터에서 한창 접전일 때 두 병사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질질 끌고 도망쳤습니다.
어떤 병사는 백 보를 도망가서 멈추고(或百步而後止) 어떤 병사는 오십 보를 도망가서 멈추었습니다(或五十步而後止). 그때 오십 보를 도망친 병사가 백 보를 도망친 병사를 보며 비웃고 나무랐다면 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쟁터에서 오십 보를 도망 간 것이든 백보를 도망간 것이든 도망간 거리만 다를 뿐이지 도망간 것은 똑같다는 이치를 아신다면 민심이 당신에게 몰리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왕의 정치나 이웃 나라 왕의 정치나 五十步百步(오십보백보)입니다.”

오십 보 도망 가놓고 백보 도망간 사람을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세상엔 많습니다.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남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보다 과대 포장하고 헐뜯는 것이 생존 무기가 되어 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무작정 다른 사람을 향해 비난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그런 문제점이 없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논어에서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비교하면서 군자는 모든 책임을 질 줄 알며, 자신에게 먼저 잘못을 묻는 사람이라 하고 있습니다. 즉 남의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자신의 잘못을 먼저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전쟁터에서 오십 보 도망간 병사가 백보 도망간 병사를 보고 웃었다는 맹자의 오십보백보 이야기가 오늘날 낮선 이야기 같지가 않습니다.

박재희였습니다.


From 넷향기(postmaster@nethyangki.net)

작은 뱀을 태우고 행군하라!

작은 뱀을 태우고 행군하라!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내가 높아지려면 내 주변사람부터 높여라! 이것이 진정 내가 높아질 수 있는 방법이다. 예, 옛날 어른들이 밥상머리에서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면 주변을 먼저 높이라는 역설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논리입니다. 내가 주변에서 쓰고 있는 사람들을 우대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 사람은 남에게 더욱 소중하게 대접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비자>란 고전에 보면 물이 말라버린 연못 속의 뱀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런 역설의 미학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일명 학택지사(涸澤之蛇)라는 고사입니다. 학(涸)은 물이 말라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학택(涸澤)은 바짝 물이 말라버린 연못이란 뜻입니다. <<한비자>> <설림(說林)> 편에 나오는 물이 말라버린 어느 연못에 사는 뱀의 생존전략은 이렇습니다.

어느 여름 날 가뭄에 연못의 물이 말라버렸습니다. 그 속에 사는 뱀들은 다른 연못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죠. 이 때 연못에 사는 작은 뱀이 나서서 큰 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앞장서고 내가 뒤 따라 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보통 뱀인 줄 알고 죽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저를 당신의 등에 태우고 가라.

그러면 사람들은 조그만 내가 당신처럼 큰 뱀이 떠받드는 것을 보고 나를 아주 신성한 뱀, 즉 신군(神君)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 아무런 해도 안 끼치고 오히려 떠받들 것이다.’ 큰 뱀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뱀들은 당당히 사람들이 많은 길로 이동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큰 뱀이 작은 뱀을 떠받드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고 뱀들을 건들지 않았고, 결국 뱀들은 목적지까지 아무런 장애도 없이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리더가 부하직원을 떠받드는 것이 결국 조직의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고사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齊)나라 리더였던 전성자(田成子)가 위기에 빠져 정치적 목적으로 연(燕)나라로 갈 때 그의 부하였던 치이자피(鴟夷子皮)란 사람이 이 학택지사의 고사를 들어 자신이 모시던 전성자를 설득할 때 나온 이야기 입니다. 그는 이렇게 설득하였습니다.

‘주군은 훌륭하시지만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당신을 따른다면 남들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겠지만, 주군처럼 훌륭하신 분이 저를 받들고 따르신다면 세상 사람들은 저의 지위를 짐작 못하고 모두 융숭한 대접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이 받드는 사람에 대한 나의 신분은 상상이 안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성자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이들 일행이 연나라에 들어갈 때 가는 곳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한비자>의 고사는 어떻게 주변 사람들을 대접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리더보다 뛰어난 부하가 어디 있겠습니까? 능력이 있다면 그가 리더가 되었겠죠. 그러나 자신보다 못한 부하를 남이 보는 가운데 더욱 우대하고 대접해 준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조직의 맨 파워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수준이 안 된다고 남들이 보는 가운데 부하직원을 무시하기 보다는, 그들의 작은 능력이라도 인정해주고 북돋아 준다면 결국 조직을 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리더가 보는 안목은 높고 넓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안목과 상식정도로 조직을 이끈다면 아마도 진정 위대한 리더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보다 못하지만 부하를 예우하고 그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인정해주었을 때, 사람들은 그 리더의 사람 보는 눈과 부하를 예우하는 능력에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박재희였습니다.


넷향기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박재희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서 가장 큰 고민은 명분과 이익사이의 갈등일 겁니다. 명분을 따르자니 이익이 없고, 이익을 추구하자니 명분이 달리고, 정말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으실 겁니다.

명분과 이익,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예로부터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텍스트로 유명한 <대학>에는 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物有本末 事有終始) 어떤 것을 먼저 할지 뒤에 할지 안다면 진정 도에 가까울 것이다.(知所先後則近道矣)’ 사실 제가 대학을 처음 읽었을 때 이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머리로만 해석이 되었지 가슴으로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더군요.

사람은 왜 생각하고 경험한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전은 세상을 살아 본 사람들의 안목으로 봐야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이든 근본과 말단, 처음과 끝이 있다. 따라서 리더는 선후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사결정에 중요한 기준이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본말(本末)과 시종(始終), 그리고 선후(先後)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진행할 때 선후를 따집니다.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말단인지, 어떤 것을 먼저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지를 정확히 가릴 수 있다면 이치를 알고 순리를 아시는 분일 겁니다. 문제는 무엇이 선후고, 본말이고, 시종인지 판단하는 것인데요.

맹자와 순자는 선후를 의(義)와 리(利)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의(義)는 명분이고 리(利)는 이익입니다. 명분과 이익 이 두 가지 개념은 동양철학에서 보면 대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서의 문제일 뿐입니다. 명분만 추구하고 이익을 도외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먼저 추구할 것인가? 에 대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전국시대 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명분을 추구하고 이익을 뒤로하면 영광을 얻을 것이다. 선의이후리자영先義而後利者榮 반대로 먼저 이익을 추고 명분을 나중에 한다면 반드시 욕을 먹을 것이다. 선리이후의자요욕先利而後義者辱 선의후리(先義後利)와 선리후의(先利後義) 이 두 가지 상반된 순서의 결과는 어마어마합니다.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은 참담한 결과를 얻을 것이고 명분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은 영광을 얻을 것이란 순자의 이 이야기는 명분과 이익은 선후의 문제이며 선후와 본말을 정확히 알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간단한 이야기지만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오로지 돈만 벌겠다고, 높은 자리만 올라가겠다고 선후를 바꾸고 본말이 전도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 당장은 원하는 것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긴 인생의 항로에서 보면 결코 아름다운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아이디어를 창출함에 원칙과 명분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라면 성공과 아울러 사회적인 존경이란 진정한 영광이 담겨 있을 겁니다.

이순신 장군은 백성의 안위와 조국의 운명을 先으로 하였고 자신의 영달과 성공을 後로 하였기에 성웅으로 존경 받을 수 있었던 아닐까요? <대학>에서는 이 본말론과 선후론을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기본란이말치자부의其本亂而末治者否矣라! 그 근본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그 말단이 제대로 다스려지는 경우는 없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개인 성공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후가 바뀌고 본말이 전도된다면 그 이익과 성공은 결코 탄탄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명분 없는 영원한 이익은 없습니다. 근본이 안 되어 있는데 말단이 잘될 일이 없습니다.

선후를 알고 본말을 알아서 차근차근 순서대로 일을 풀어 가신다면 결국 명분과 이익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 참으로 쉽지 않은 화두입니다.

박재희였습니다.


From 넷향기(http://nethyangki.net/)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 무중생유(無中生有)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 무중생유(無中生有)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 재 희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없어서 어떤 방법도 없을 막막할 때가 있을 겁니다. 돈은 모두 떨어지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다른 곳으로 가 있고 주변에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도와주지 않을 때 이런 막막한 때에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이 난국을 돌파 하시겠습니까? 이럴 땐 무중생유의 병법을 한번 떠 올림심이 어떠십니까?

무중생유(無中生有)라!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라(生)!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은 없다.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 속에도 반드시 길은 있다. 없다고 주저앉지 말고 신념을 가지고 방법을 찾으면 길이 보일 것이다. 뭐 이런 전술 입니다.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한탄만 한다고 해결 방법이 찾아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도저히 방법이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답을 찾아내는 것이 무중생유의 전술을 이해하는 유능한 리더의 행동방식입니다.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이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적의 화살 10만개를 만들어 쓴 것도 무중생유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궁하면 통한다는 긍정의 힘이 결국 답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전술의 철학적 토대는 노자의 도덕경입니다. ‘천하의 모든 존재는 유(有)에서 나오지만 그 유(有)는 결국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결국 ‘없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있음의 유(有)는 없음인 무(無)가 있을 때 성립되는 개념입니다. 유는 무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무중생유의 계책은 세상의 사물은 모두 변화 발전한다는 전제에서 시작됩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겨울이 가면 반드시 따뜻한 봄이 온다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유(有)와 무(無)의 상생을 본 것입니다. 내가 처한 환경과 조건이 아무리 혹독하고 어렵더라도 반드시 그 속에서 새로운 성공의 싹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무중생유’의 철학입니다.

이 전술을 유용하게 사용한 역사적 예가 있습니다. 당(唐)나라 안록산(安祿山)은 반란을 일으켜 많은 지방 관리들을 투항시켰습니다. 그런데 장순(張巡) 장군만은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투항하지 않고 3천명의 병력으로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때 안록산은 4만의 군대를 보내 성을 포위하였고 성안에 군대는 화살이 떨어져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무(無)의 상황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무기든 병력이든 어떤 것도 없었던 장순은 무중생유(無中生有)의 전술을 사용합니다. 삼국시대에 제갈량이 풀로 만든 배를 보내 적의 화살을 얻었듯이 풀로 엮어 만든 거짓 병사들에게 검은 옷을 걸쳐 야간에 성벽을 타고 내려가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적군은 성안의 군사들이 야간 공격을 해온다고 생각하여 화살을 소나기처럼 퍼부었고 장순은 쉽게 적의 화살 수십만 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적은 자신들이 속았다고 분노하였고 그 날 밤 장순은 정예부대 5백 명을 다시 내려 보내 안심하고 있는 적의 진영을 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적의 혼란한 틈을 타서 성안의 병사들을 이끌고 총 공격을 하여 승리하였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무중생유’의 전술이 먹혀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이 전술을 사용할 때 두 가지 점에서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좋은 조건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둘째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면 신속하게 허(虛)를 실(實)로 전환하고 거짓(僞)을 진짜(眞)로 전환하고, 무(無)를 유(有)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살면서 얼마든지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위기에서 탈출하느냐 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되었을 때가 다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무중생유(無中生有)라!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라! 원래부터 있는 것은 없다. 없음에서 있음이 나왔다는 것을 잊지 말라!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긍정의 생각을 가진 사람만이 무중생유의 전술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박재희였습니다.


넷향기(http://nethyangki.net/)에서 받은 글입니다.

부귀를 구하는 방법

부귀를 구하는 방법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함께 사는 배우자나 자식에게 인정받고 산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가족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는 분이라면 아마도 다른 어떤 자리 누구에게서라도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분 일겁니다. 오늘은 <맹자>에 나오는 남편의 출세와 성공의 비밀을 알고 통곡하는 어느 부인의 일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중국 제(齊)나라에 어떤 남자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밖에 나갔다가 들어만 오면 집에 있는 부인에게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들어왔다고 자랑을 늘어놓았죠. 부인이 누구와 음식을 먹었느냐고 물으면 그저 돈 많고 귀한 사람과 함께 식사하였다고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그토록 존귀한 사람과 친하다고 하는 남편이 왜 평소에 한 번도 그런 사람을 데리고 집에 오지 않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새벽에 부인은 아침에 나가는 남편 뒤를 따라가기 시작하였는데요, 남편은 집에서 나간 뒤 특별한 목적지 없이 여기 저기 돌아다녔고, 함께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은 동쪽 성문 밖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족하면 이리 저리 다른 무덤에 가서 구걸을 하여 얻어먹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어떻게 매일 배부르게 먹는지에 대해 드디어 알게 되었죠. 집에 돌아온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습니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부인이 평생 우러러 존경하며 살아야 할 대상인데 지금 그 남편은 더 이상 존경의 대상도 영웅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집에 돌아 온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또 다시 오늘 얼마나 존귀하고 유명한 사람들을 만났는지를 자랑하며 부인에게 교만을 떨었답니다.

맹자는 이 이야기를 제자에게 들려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부귀와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그 자세한 내용을 알면 그 부인이 부끄러워 통곡하지 않는 자 드물 것이다!(人之所以求富貴利達者, 其妻妾不羞也, 而不相泣者, 幾希矣라!)’ 이 이야기는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어떤 부끄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던 당시 사회 풍토에 대한 맹자의 일갈입니다.

아울러 옳지 못하고 부끄러운 방법으로 부귀와 영달은 구하지 않겠다는 맹자의 인생관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사람들의 부귀와 성공을 추구하는 방법을 돌아보게 됩니다. 언론 여기 저기 터져 나오는 성공한 사람들의 부끄러운 뒷이야기를 들으며 진정한 성공과 출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맹자는 하늘과 땅,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는 리더의 모습으로 대장부를 말합니다. ‘내 뜻을 세상이 알아주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과 내 뜻을 실천할 것이오(得志면 與民由之오), 내 뜻을 알아주지 못하면 나 홀로 나의 길을 걸으며 살리라(不得志면 獨行其道 하리라!)’ 맹자가 꿈꾸는 당당한 대장부의 모습. 더 이상 이상이며 꿈이라고 외면할 모습은 아닌 듯싶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절이라도 내가 사는 방법을 한번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아남는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박재희였습니다.


From 넷향기(http://nethyangki.net/)


분노를 옮기지 마라!

분노를 옮기지 마라!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나는 평생 새로운 것을 배우기 좋아한다. 나는 아무리 화가 나도 주변 사람에게 그 화를 풀지 않는다. 나는 한번 저질렀던 잘못을 두 번 세 번 반복하지는 않는다. 모두 정말 모두 쉽지 않은 덕목들일 겁니다. 우리는 과연 이 중 몇 가지나 가능할까요?

공자의 제자 중에 안회(顔回)라는 사람이 바로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공자가 그의 제자들 중에서 누구보다 아꼈던 수제자 안회. 젊은 나이에 요절한 불운의 사나이기도 한 안회는 맹자와 함께 유교의 인물 중에서 공자 다음으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그가 머리가 갑자기 하얗게 새어가며 원인도 모르고 죽었을 때 공자는 “천상여(天喪予)! 천상여(天喪予)!”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면서 제자의 죽음에 통곡하였습니다. 공자가 73세의 인생을 살면서 먼저 세상을 떠나보낸 제자가 한 둘이 아닐진대 그토록 애통하게 제자의 죽음에 슬퍼한 적은 없었습니다.

너무 슬피 우는 공자에게 어느 제자가 너무 애통해 한다고 하자, 공자는 ‘이 사람을 위해 울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우냐’며 통곡하였던 이야기는 스승의 제자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가난한 삶을 살다간 안회였지만 그의 삶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대단합니다. ‘현명하다! 회야(賢哉라 回也여)! 한 대죽그릇의 거친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먹으며 누추한 빈민가에서 사는 것을(一簞食, 一瓢飮, 在陋巷을)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는데(人不堪其憂어늘) 너는 그 가난 때문에 너의 인생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回也不改其樂이라!) 현명하다! 안회야(賢哉라, 回也여)!’

일명 ‘거친 밥에 물 말아 먹고 사는 궁핍함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는다.’는 ‘단사표음(簞食瓢飮)’의 고사도 안회에 대한 공자의 평가에서 유래된 이야기 입니다. 이런 안회에 대한 평가 중에 가장 백미가. 공자가 살던 노(魯)나라 임금이었던 애공(哀公)의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입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안회야 말로 자신의 수제자임을 공인합니다.

첫째 안회는 배우기를 좋아한 제자다. 좋아할 호자, 배울 학자. 호학(好學)이라! 배움은 공자의 영원한 삶의 주제였습니다. 공자는 스스로 배우는 자라고 칭하였고 그 배움의 결과를 전하는 선생이야 말로 그의 평생의 업이자 사명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의 방법에 가장 근접한 제자. 바로 안회였던 것이죠. 죽고 나서 가장 갖고 싶은 칭호는 학생입니다. 평생 배우다 간사람, 이렇게 기억되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인생이 아닐까요?

둘째 안회는 자신의 분노를 남에게 옮기지 않았다. 아니 불자, 옮길 천자, 성낼 노자, 불천노(不遷怒)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분노를 어디든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안회는 자신의 분노를 속으로 삭이며 멈출 줄 알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나의 분노를 주변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처럼 비겁한 일은 없습니다. 자신의 분노를 사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완성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닐까요?

셋째 안회는 한 번 저지른 과오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았다. 불이과(不二過)라!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지만 두 번 반복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실수로 그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안연이었습니다. 잘못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잘못을 두 번 저지르는 것인 문제라고 합니다. 잘못을 떳떳하게 인정하고 과감하게 고치는 사람이 진정 성공하는 자 일겁니다.

여러분! 세상에 어느 누가 완성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한 때 잘 배운 사람보다는 평생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 시대에 진정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일 겁니다. 세상에 누가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분노를 참는 사람보다는 주변에 그 분노를 옮기지 않는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일 겁니다. 세상에 누가 잘못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잘못을 아예 안 하는 사람보다는 한 번 한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 더욱 현명한 사람일 겁니다.

평생 배우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화내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며 고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박재희였습니다.


넷향기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몰입의 즐거움

몰입의 즐거움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선비’라는 계층만큼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한 계층은 없을 겁니다. 일본 역사에서 사무라이 라는 계층에 비견할 만한 이 조선의 ‘선비’라는 계층은 오늘날 우리가 다시한번 재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합니다.

일명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 계층은 독특한 문화와 활동 역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야에서는 지역사회의 여론 주도 계층이었고, 다양한 지역의 분쟁을 조정하는 해결자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왕권의 가장 강력한 견제자로서 정책의 부당함을 목숨을 걸고 저지하였고, 나라가 위급할 땐 붓을 꺾고 칼을 들었던 구국의 투사이기도 하였습니다. 선비는 때론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허위의 양반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세상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지식 속에서만 안주하는 고집 센 사람의 표본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죠.

그런데 이 조선 왕조 5백 년을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선비’ 계층의 가장 긍정적인 특징 하나를 들라면 바로 ‘몰입’이 가능한 계층이었다는 것일 겁니다. 선비들은 우선 독서에 몰입하는 훈련을 어려서부터 받았습니다. 어떤 책이든 잡으면 완전히 독파할 때 까지 끝없이 반복해서 그 뜻을 추적해 나가는 몰입의 방법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어렸을 때 몰입의 훈련은 다양한 방면에서 발휘되기도 하였죠. 어떤 선비들은 섬으로 유배를 가서 해양생물에 몰입하여 바다 생물에 관한 백과전서를 남기기도 하였고, 어떤 선비는 의학에 몰입하여 한국인의 풍토와 인물에 맞는 의학서를 저술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것이든 그들의 관심영역에 들어오면 무서울 정도의 열정으로 몰입하여 그 이치를 깨달았던 사람들입니다. ‘선비의 몰입’ 오늘날 우리가 계승해야 할 선비정신 중에 하나일 겁니다.

<중용>이란 책에는 선비의 몰입과 관련된 5가지 몰입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박학(博學)! 배우려면 널리 배워라! 둘째 심문(審問)! 물으려면 깊이 파고들어 물어라! 셋째 신사(愼思)! 생각하려면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생각하라! 넷째 명변明辨)! 판단하려면 명확하게 판단하라! 다섯째 독행(篤行)! 행동하려면 독실하게 실천하라! 일명 중용에서 나오는 5가지 몰입에 관한 이론입니다. 중용에서는 5가지 항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군자는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운다고 마음먹었으면 완전히 통달하지 않고는 그만 두지 않는다. 묻지 않을지언정 한번 물으면 정확히 알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한번 생각하면 명확한 해답을 얻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는다. 판단하지 않을지언정 한번 판단하면 제대로 밝히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을지언정 한번 행동하면 확실히 실천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는다.’

모두가 어떤 것이든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몰입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비들은 이 5가지 몰입 이론에 근거하여 어떤 분야든 끝까지 파고들어 그 원리를 깨치고 바닥을 보는 것을 선비 됨의 자세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 분야에 대한 노력과 열정을 중용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한 번에 그 일을 해내면 나는 백 번에 해낼 것이며(人一能之면 己百之오), 다른 사람이 열 번을 하여 그 일을 해 내면 나는 천 번에 해 낼 것이다.(人十能之면 己千之라). 군자의 학문은 안하면 안했지(君子之學 不爲則已) 한번 하면 반드시 끝장을 본다.(爲則必要其成)

저는 중용의 이 구절을 읽을 때 마다 어떤 전율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넓은 배움과 깊은 물음. 신중한 생각과 명확한 판단, 그리고 과감한 행동. 범상치 않은 몰입의 방법들입니다. 넓게 배워라! 博學, 그리하여 배움의 지평을 확장하라! 깊이 물어라! 審問, 그리하여 깊은 답을 찾아내라! 신중하게 생각하라! 愼思, 그리하여 후회가 없게 하라! 명확하게 판단하라! 明辯, 그리하여 한 치의 착오도 없게 하라! 독실하게 행하라! 篤行! 그리하여 완벽하게 일을 수행하라! 조선의 진정한 선비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감사합니다.


From 넷향기(http://www.nethyangki.net/)


맹자의 "오! 행복한 인생論"

맹자의 "오! 행복한 인생論"
박재희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일 겁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는 것이 재미없다고 하시는 분들 맹자가 말하는 행복론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전국시대 모든 제후들의 주목을 받으며 신하로서 초빙하고 싶은 스카우트 대상 1호였던 맹자의 행복론은 이렇습니다.
“군자는 인생의 행복이 세 가지가 있다(君子有三樂). 천하에 왕 노릇하는 즐거움도 이 세 가지 행복 중에 끼지 못한다(王天下不與存焉). 첫 번째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아무런 탈없이 건강한 것이 처음의 행복이다.(父母俱存하며 兄弟無故가 一樂也라)
둘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고, 땅을 내려 보아 남에게 창피하지 않게 사는 인생이 두 번째 행복이라((仰不愧於天하고 俯不?於人이 二樂也)
셋째 천하의 똑똑한 영재들을 모아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인생의 행복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가 三樂也니라)”
어떻습니까. 맹자의 인생삼락의 행복론. 너무 소박한 것 아닙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알아주는 천하의 지도자가 되는 것도 내 인생의 세 가지 행복에 들지 못한다는 맹자의 말에 동의하십니까? 명심보감엔 인간이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이 명예욕이라고 하였는데요.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주고 칭송해 주는 그 명예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입니다.

맹자의 행복론은 정말 단순하고 평범하기 까지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가 부모가 안녕하시고 형제들이 무고한 것이 행복의 으뜸이란 것인데요. 결국 가정의 행복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란 뜻이겠지요. 세상에 가장 최고의 피난처는 가족 형제가 있는 가정일겁니다.

둘째는 부끄럽지 않은 삶이란 뜻인데요. 윤동주 시인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란 시 구절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하늘은 내가 살고 있는 국가며 사회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내가 만나고 이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국가와 사회 한 점 부끄럼 없고 내가 만나고 이끄는 사람들에게 떳떳할 수 있다면 그 분은 이미 행복한 사람이신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 행복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천하의 훌륭한 인재를 모아 키우는 행복은 그 무엇 하고도 비유할 수 없을 겁니다. 천하의 영재들을 모아 그들의 능력을 키우고 그 인재들로 하여금 천하를 경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은 기업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능력을 키워 줄줄 아는 사람. 그리하여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스승처럼 따르는 분이라면 그는 누가 보아도 성공한 행복한 사람입니다.

맹자는 이 세 가지의 인생 행복을 말할 때 두 번씩이나 이 문장을 반복합니다.
"王天下不與存焉이라. 王天下不與存焉이라."
천하의 왕이 되는 즐거움도 이 세 가지 즐거움에 끼지 못한다.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에 한도를 넘어선 탈선이 횡행하고, 오로지 성공을 위하여 어떤 일이든 마다않고, 명예를 얻기 위하여 파렴치한 짓도 서슴지 않는 이 시대에 건강하고 소박한 맹자의 인생 행복론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한번쯤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넷향기님이 보내주신 메일입니다.

논어의 대인관계 6계명

논어의 대인관계 6계명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오늘은 논어에서 말하는 인간관계 원칙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수 많은 동양 고전 중에서 대인관계와 관련된 최고의 책을 꼽으라 하면 두 말 할 나위 없이 논어를 꼽을 것입니다.
논어에는 부모와 자식, 군주와 신하, 국가와 백성, 친구와 친구,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등 모든 인간관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논어에서 말하는 인간관계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간단히 몇 가지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공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己所不欲을 勿施於人하라!
己所不欲,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勿施於人,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입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인간관계의 시작이란 뜻이겠지요.

내가 쓰고 싶지 않은 물건 고객도 쓰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제품을 만들든 고객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하고 만든다면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한 번만 고민해 보면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첫걸음일겁니다.

둘째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마라! 그보다 먼저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라!
不患人之不己知요 患不知人也)라!
좋은 보석은 누구나 알아보기 마련입니다. 囊中之錐라고 하나요!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은 반드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정말 알아 줄만한 실력과 인격을 먼저 갖추면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잘못을 알았으면 고치는데 주저하지 마라!(過則勿憚改)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잘못이다(過而不改, 是謂過矣).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쉬쉬하며 문제를 덮으려고 하다가는 결국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잘못을 하는 것 보다 고치지 않는 것이 정말 잘못이라는 지적입니다.

넷째 자신과 다른 것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에게 해가 될 뿐이다.(攻乎異端 斯害也已) 나와 다른 것에 대하여 무조건 비판하고 깎아내린다면 결국 본인에게 해만 될 뿐이라는 경고입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과 함께 할 때 관계는 소통됩니다. 오로지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다섯째 군자는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서 찾는다(君子는 求諸己라).
그러나 소인은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린다(小人은 求諸人이라).

군자는 공자의 영원한 이상형입니다. 소인은 물론 그 반대이고요.
떳떳이 모든 책임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내 탓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군자란 뜻입니다.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는 것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섯째 군자는 모든 사람과 조화를 이루나 같음을 강요하지는 않는다(君子和而不同이라!
반면 소인은 같음만을 원하고 조화를 이룰 줄 모른다(小人同而不和).

일명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화(和)는 조화입니다.
탄력적인 눈높이를 가지고 주변사람과 역동적인 인간관계를 갖는 것을 화(和)라고 합니다.
반면 동(同)은 패거리입니다. 고정관념과 이익에 눈이 가려 패거리를 만들어 싸우는 사람을 동(同)이라 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포용의 정신이 인간관계의 완성입니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논어의 인간관계 이론을 생각해 보았는데요. 논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져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에야 知松栢之後凋也라)
좋은 사람, 좋은 기업은 어려운 상황이 되어서도 빛이 납니다.
어렵다고 모두 변칙으로 조직을 운영할 때, 원칙을 소중히 여기고 가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은 어려울 때 더욱 빛이 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넷향기(http://nethyangki.net/)'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버려야 산다. 차시환혼(借屍還魂)

버려야 산다. 차시환혼(借屍還魂)
박재희

중국의 병법 중에 차시환혼(借屍還魂)이란 전술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빌릴 차(借)에 죽은 사람의 시신을 뜻하는 시(屍), 차시(借屍)는 죽은 다른 사람의 육신을 빌린다는 뜻이고, 돌아올 환에 영혼 혼, 환혼(還魂)은 나의 죽었던 혼을 되돌린다 뭐 이런 뜻인데요.. 그러니까 내 육신이 없어지고 영혼만 남았을 때 다른 죽은 사람의 시체라도 빌려서 다시 환생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전술입니다.

이 병법은 자신의 잃어버린 영혼을 다른 사람의 육신을 빌려 환생하였다는 어느 도사의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옛날 이현(李玄)이라는 도사가 있었는데 워낙 도력이 높아 누구나 보면 신선 같은 풍모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우아한 육신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이 도사는 인간계와 선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는데, 어느 날 잠시 육체를 떠나 신선이 있는 하늘로 영혼이 올라갔는데, 7일 만에 다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육신이 다른 사람들 손에 불태워 없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은 그 도사를 죽었다고 생각해서 그랬겠죠. 자신의 우아한 육체를 잃어버리고 고민하던 그 도사는 마침 길거리에 죽어있는 거지의 죽은 시신을 발견하고 그 거지의 몸속으로 들어가 인간으로 다시 환생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자신이 들어간 새로운 시신이 별 볼일 없는 거지의 몸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그는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인데요. 만약에 지상으로 돌아온 이현(李玄)이 자신의 우아한 옛날 육체만 고집하고 새로운 육신을 거부하였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는 영원히 인간으로 살아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영혼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현실을 거부하고 지나간 시절만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으로 자주 인용되는 고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과연 이런 상황이라면 옛날의 우아한 모든 것을 버리고 더럽고 천한 거지의 몸을 선택하실 수 있겠습니까?

회사가 부도나거나 조직이 와해되어 자리를 잃게 될 때 반응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주저앉아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만 흘리는 유형이고, 둘째는 툴툴 털고 다른 조직, 다른 직책으로 바꿔 타고 새롭게 자신의 영혼을 되살리는 유형이지요.

비록 별 볼일 없는 조직의 하찮은 직책이라도 그 계기를 통해 새롭게 재기하는 전략을 세우실 수 있는 분이라면 남의 시신을 빌려 자신의 영혼을 되살리는 차시환혼(借屍還魂)의 병법을 꿰뚫은 분이실 겁니다.

비록 이전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남들에게 보이기 싫은 내 모습이라도 내 영혼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주저 없이 바꿔 타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기업 임원을 지내다가 중소기업의 하찮은 자리로 옮겨 결국 더 큰 승리를 얻었다는 분이나, 3도 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있다가 백의종군하는 하찮은 자리라도 마다않고 기꺼이 운명을 갈아탈 줄 아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 속에서 상황을 직시하고 유연하게 자신의 모습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세상엔 고정된 모습이란 없다. 다가 온 모습을 유연하게 받아들여 내 모습을 바꿀 줄 아는 자만이 승리를 유지할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이런 유연한 사고를 강조하면 물을 닮으라고 말합니다.

수무상형(水無常形)이라! 물은 고정된 모습이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장군은 물과 같아야 한답니다. 자신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부술 줄 아는 장군만이 마지막 승자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육체(屍)냐가 아니라 어떤 정신(魂)을 가지고 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처세나 조직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차시환혼(借屍還魂)의 전술은 결국 영원한 생존을 위한 전술입니다. 생존을 위하여 새로운 육체를 찾아 끊임없이 떠도는 영혼(魂)의 계속되는 행진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의 행동방식이며 삶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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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材를 막는 맹구(猛拘)

人材를 막는 맹구(猛拘)
박재희

유능한 인재를 불러 모으는 것이야 말로 예나 지금이나 조직의 생존에 중요한 일입니다. 얼마나 능력 있는 인재가 그 조직에 오려고 하느냐는 그 기업의 성패와 관련된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군이 인재를 그토록 아끼는데도 인재가 선뜻 찾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비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고사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송나라 사람 중에 술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 사람은 술도 넉넉히 주고 오는 손님에게도 정말 친절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손님이 점점 줄어들더니 급기야 술은 팔리지 않아 모두 쉬게 되었죠. 결국 그 집은 손님의 발길이 끊기게 되어 문을 닫게 되었는데, 술집 주인은 그 동네 가장 지혜로운 어른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어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너의 집개가 사나워서 그런 것이다.(狗猛) 너희 집에 손님이 오면 너희 집 사나운 개가 그토록 짖어대고, 심지어 어린아이가 부모의 심부름으로 술을 사러 오면 너희 집 개가 물어뜯으며 위협하니 어느 누구도 너의 집에 술 사러 가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술이 맛있어도 사나운 개가 있는 한 손님이 안 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라."

한비자는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라에도 사나운 개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인재를 아끼고 훌륭한 군주가 있더라도 주변에 그 인재를 받아들이고 아껴줄 신하가 없다면 결국 인재는 찾아오지 않게 된다는 거죠. 훌륭한 인재가 좋은 능력을 가지고 찾아왔는데 주변의 대신들은 사나운 개가 되어 이리저리 그 사람을 헐뜯으며 참소하니 결국 인재들은 모두 떠나고 그 나라에는 진정한 인재가 찾아오지 않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한비자의 본의는 간단합니다. 아무리 인재를 아끼는 군주가 있더라도 주변에 인재가 오는 것을 막고 오로지 헐뜯기만 하는 사나운 개와 같은 신하들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떤 인재도 그 조직에서 못 배겨날 것이란 이야기이지요. 왜 아무리 맛있는 음식점도 종업원이 불친절하고 마음에 안 들면 선뜻 안 가게 되는 이치와 같은 것 아닐까요?
군주가 백성들의 민심을 얻지 못하는 이유 중에 주변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사람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순자의 말 중에도 이런 유사한 말이 있습니다.
‘선비에게 질투하는 친구가 있으면 주변에 좋은 친구가 모여들지 않는다.(士有妬友則 賢交不親이라)
군주에게도 질투하는 신하가 있으면 그 주변에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들지 않을 것이다.(君有妬臣則 賢人不至)’
여기서 질투 많은 벗, 투우(妬友)와 질투 많은 신하, 투신(妬臣)은 한비자가 말한 사나운 개 맹구와 같습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나 보존하려고 으르렁거리는 사나운 개 맹구.구만리 창천을 날 수 있는 붕새는 그 사나운 개의 짖는 소리를 듣기 싫어 쓴 웃음을 지면서 남쪽으로 먼 하늘을 떠나는 겁니다.

순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맹자도 군주의 주변엔 어떤 신하들이 있는가가 중요하다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어느 초나라 귀족이 자기 자식에게 제나라 말을 배우게 하려 하였는데 제나라 말에 능통한 제나라 출신의 선생에게만 맡겨서만 안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업만 마치면 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초나라 말로 떠들어 되기 때문이 바로 제나라 말을 잊어버린다는 거죠. 맹자는 진정 자식에게 제나라 말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제나라 수도 중심가에 가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제나라 말을 하는데 어찌 그가 제나라 말에 능통하지 못하겠는가? 맹자의 이 이야기도 결국 주변에 어떤 신하들이 포진해 있는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는 뜻으로 말한 겁니다.

여러분! 정말 주변에 어떤 사람을 두는가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주변의 사나운 개 한 마리를 잘못 두면 모든 사람들이 멀어지는 비극을 면치 못할 수 있습니다.
한번쯤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심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맹구지환의 화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넷향기님으로부터 받은 글입니다.



소신없는 모방에 대한 경고, 동시효빈(東施效嚬)

소신없는 모방에 대한 경고, 동시효빈(東施效嚬)
박재희

여러분들 병법 중에 미인계 전법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36계중에서 31번째 계책인 미인계는 여성을 통해서 상대방 리더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칼 없이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전투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였던 마키아벨리도 ‘여자가 끼어듦으로써 생기는 불의의 사건에 의해 조직의 질서가 깨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라고 하면서 미인계의 위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인계의 어원은 강태공이 쓴 육도(六韜)라는 병법서에 나오는데 ‘상대방을 무너뜨리려 할 때 무기와 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상대방 신하들을 포섭하여 군주의 눈과 귀를 막아버리고, 미인을 바쳐서 군주의 마음을 유혹하라!’는 해설이 덧 부쳐 있습니다.

중국에서 미인계와 관련된 여성을 꼽으라 하면 서시(西施)를 꼽을 겁니다.
절강성 시골 나무꾼의 딸이었던 서시. 그녀는 월나라 왕 구천에 의해 발탁 훈련되어 오나라 왕 부차에게 미인계로 사용되어 결국 오나라를 망하게 만든 여인으로 유명합니다.

서시와 관련된 이야기는 동양의 여성문화 콘텐츠로 다양하게 남아있는데 특히 자기 주관 없이 다른 사람의 모습만 따라하다가 결국 자신의 모든 장점을 잃어버리는 동시효빈(東施效嚬)의 고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동시효빈(東施效嚬) 우화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어느 마을에 시(施)씨 성을 가진 미모의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집이 마을 서쪽 언덕에 있었기 때문에 서시(西施)라고 불렀답니다. 서시의 서(西)는 성이 아니라 원래 시(施)씨고, 서쪽에 사는 시씨라는 뜻입니다. 중국 4대 미인 중에 한 사람이지요. 그 마을 동쪽 언덕에는 역시 시(施)씨라는 성을 가진 엄청나게 못생긴 추녀가 살았는데 동쪽에 사는 시씨라고 해서 동시(東施)라고 불렀답니다.
서쪽에 사는 미녀 서시(西施), 동쪽에 사는 추녀, 동시(東施) 한 마을에 사는 미인과 추녀의 대표적인 여인들이었습니다. 동시는 추녀였기 때문에 예쁜 여인들이 입는 옷을 사 입고 그들의 행동과 자태를 흉내를 내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 하였습니다.
자연히 서시는 동시의 동경의 대상이었고, 서시가 어떤 옷을 입든 자기도 사서 입고, 어떤 모양의 머리 모양을 하던 그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하였던 모양입니다. 동시는 오로지 서시처럼 되기 위해서 늘 서시의 모든 행동을 관찰하고 따라했습니다.

어느 날 선천적인 가슴 통증이 있었던 서시가 길을 가다 갑자기 통증을 느껴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이맛살을 찌푸렸는데 그것을 본 동시는 그것이 서시가 남들에게 미인으로 인정받는 행동이라 생각하여 자기 동네로 돌아와서 자기도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맛살을 찌푸리며 돌아 다녔습니다.

일명 본받을 효(效)자에 찡그릴 빈(嚬)자, 효빈(效嚬)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행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작정 따라하는 맹목적인 행동을 나무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렇잖아도 못 생긴 동시가 얼굴까지 찡그리며 다니는 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시효빈(東施效嚬)이라! 동시가 서시의 얼굴 찡그리는 것을 본받다가 더욱 더 추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이야기는 장자가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지나간 시대의 가치관을 본받으며 전혀 새로운 상황에 적응 하지 못하는 뜻으로 사용한 비판입니다.

돌이켜 보면 요즘 시대 동시 같은 사람이 너무 많다고들 합니다.
연예인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와서 똑같이 해달라고 조르는 사람이나, 명문가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따라하겠다는 기본이 안 된 졸부나 모두 오늘 날의 동시가 서시를 따라서 얼굴을 찡그리는 동시효빈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의 걸음걸이를 잃어버리고, 물고기처럼 자기중심을 잃고 떼를 지어 떠도는 사회 속에서 자신만의 문화를 가지고 보듬고 나가는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노자 도덕경 80장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문화를 떠올립니다.
“저는 이런 문화를 꿈꿉니다. 내 밑의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이 가장 아름답고, 자신들이 누리는 문화가 가장 훌륭하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 가장 편안하고, 자신들이 먹고 있는 음식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문화 말입니다.”
남들의 눈치와 분위기에 발목이 잡혀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 나가지 못하는 분들이라면 동시효빈의 고사를 기억하면서 한번쯤 내가 가진 문화에 대하여 소중하게 생각해 볼 때입니다.



40대의 마음, 불혹(不惑)과 부동심(不動心)

40대의 마음, 불혹(不惑)과 부동심(不動心)
박재희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은 자신이 지나온 삶에 대하여 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 대한 회고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공자의 인생 회고론 인데요. 아마도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이야기 일겁니다.
공자는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퇴역군인 64살의 아버지와 그의 세 번째 여인이었던 17살의 무속인 사이에서 ‘들판에서 합해서 태어난 야합이생(野合而生)’, 그러니까 부적절한 혼인관계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렵게 73년의 인생을 살다 간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15살에 지식을 상품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내 인생을 고대문화 유산을 배우는데 두었다. 뜻 지자 배울 학자. 지학(志學). 그리고 15년 후 30대에 나는 비로소 내 분야에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다. 이립(而立). 내 나이 40대에는 확고한 나의 길이 정해져 어떤 것에도 유혹당하지 않게 되었다. 불혹(不惑huo?). 그리고 50대에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에 대하여 비로소 정확히 알게 되었다. 지천명(知天命). 60대에는 어떤 누구의 말에도 한 귀로 들으면 한 귀로 흘려보낼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이순(耳順). 내 나이 70대. 난 내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어떤 행동을 해도 원칙과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종심(從心).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공자의 인생 회고론입니다.
격정과 변화의 시기였던 춘추시대를 살다간 중국 최초의 교육자이자 지식인 1호라고 칭해지는 만세사표(萬世師表) 공자. 그의 삶의 역정이 잘 나타나 있는 논어의 인생 회고론 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 마다 40대의 나이, 불혹(不惑)의 나이에 대하여 생각해봅니다.
공자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 유혹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어떤 유혹에 끄떡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공자가 죽은 지 100여 년 뒤 전국시대에 활동했던 맹자는 그의 40대를 부동심(不動心) 즉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자기 나이 40을 불혹이라고 정의 했다면 그보다 늦게 태어난 맹자는 부동심이란 마음으로 되받아 친 것입니다.
공자의 고향 산동성 취푸(曲阜) 가까운 곳, 쩌우청(鄒城)에서 태어난 맹자. 자신의 인생과 비슷하게 홀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살다간 공자라는 인물에 대하여 자신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목표였고, 따라 하기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맹자는 자신의 인생 40대를 부동심(不動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은 공자의 40대에 대한 정의, 불혹(不惑)의 변형일 수 있을 것입니다. 100여 년을 사이에 두고 공자와 맹자는 모두 그들의 40대를 불혹과 부동심이라고 비슷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비록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명분 없는 어떤 부귀와 출세에도 타협하지 않았던 부동심의 맹자는 그의 제자였던 공손추가 ‘제나라 왕이 선생님을 장관에 임명한다면 마음이 움직이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자신은 40대에 부동심을 이루었다고 단호히 거절합니다.
자신의 고집을 잠깐 꺾고 고개만 숙이면 당시 제후들에게 얼마든지 초빙되어 부귀를 얻을 수 있었지만 백성을 위한 왕도정치를 주장하며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는 신념을 놓지 않았던 맹자는 패도정치를 원하던 어떤 제후와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맹자의 부동심(不動心)은 자신의 인생의 전부이자 자존심이었던 것입니다.
맹자는 조그만 일엔 부동심을 곧잘 한다고 합니다.
밥 한 끼를 못 먹고 굶주리고 있을 때 욕하고 밥그릇을 걷어차며 밥을 주면 비록 내가 굶더라도 그 밥을 먹지 않는 부동심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적은 유혹엔 곧잘 부동심을 발휘하다가, 누군가 천금을 주고 큰 권세를 줄 것이니 무릎을 꿇고 네 고집을 꺾고 복종하라. 하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허리를 숙이는 움직일 動, 마음 心동, 동심(動心)이 된다고 합니다.
물론 속으론 잠시의 굴욕만 참으면 더 큰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움직이지만 밥 한 끼엔 부동심을 발휘했던 사람들이 왜 큰돈과 권세엔 그토록 마음을 쉽게 움직이는지 맹자는 그런 시대를 통탄하였습니다.
오늘 날 우리들의 사십대를 돌아봅니다.
과연 불혹과 부동심의 나이로 당당하게 살고 있는지. 당장의 이익에 자신의 생각을 접고 이리저리 줄을 서며 언제든지 불러줄 사람을 향하여 해바라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조그만 것엔 그렇게 용감하다가도 큰 유혹이 다가오면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그런 40대를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공자의 불혹(不惑)과 맹자의 부동심(不動心). 한 번쯤은 우리가 우리 인생을 돌아 볼 때 화두로 가져야 할 생각입니다.


From 넷향기(http://www.nethyangki.net/)

주역(周易)의 지도자 운명론(運命論)

주역(周易)의 지도자 운명론(運命論)
박재희

우리가 일명 점서라고 알려져 있는 주역이란 동양전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귀신같은 점괘를 얻는 그런 신비의 서적은 아닙니다.
중국의 고대국가였던 주(周)나라 사람들이 그들이 생각했던 사물이나 인간사 변화의 패턴을 적어놓은 책을 주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易)은 변화나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주역은 그러니까 주나라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생각을 촘촘히 기록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주역에 나오는 64괘(卦) 중에 가장 첫 번째로 나오는 괘(卦) 이름이 하늘 건자 건(乾)괘입니다. 건괘에서는 용이란 동물을 통하여 한 인간의 운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탄생에서부터 몰락까지 하나의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주역에서 바라보는 능력 있는 인간의 탄생과 몰락,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 단계는 물에 잠겨 있는 용. 잠용(潛龍)의 상태입니다. 잠용은 아직은 실력을 발휘할 때가 아닌 것입니다. 부지런히 실력을 갈고 닦는 용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를 대비하여 부지런히 나의 능력을 축적하고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그 용은 아직 쓰일 때가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 등용되지 않은 용입니다.
잠용물용(潛龍勿用)이라’ ‘물속에 잠겨 내공을 닦는 용은 아직은 쓰일 때가 아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수면으로 나타난 용, 현룡(見龍)입니다. 이제 모든 준비를 끝내고, 볼 견(見)은 나타난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 현(見)이라고 읽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를 끝내고 드디어 수면으로 나와 나의 능력을 알아줄 대인을 기다리는 형상입니다. 이 때 자신을 알아줄 사람, 즉 대인을 만나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현룡재전(見龍在田)이니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 ‘물 밖으로 나온 용이 밭에 있으니 귀인을 만나기에 이롭다.’

세 번째 단계는 기회를 얻어 부지런히 자신의 능력을 더욱 더 발휘하는 단계입니다.
‘군자종일건건(君子終日乾乾)하야 석척약(夕?若)이니 려무구(?无咎)니라.’
‘지도자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또 저녁에도 밤늦도록 일하니 어떤 위기와 난국이 와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정말 아낌없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힘차게 뛰어 올랐다가도 상황이 안 좋으면 잠시 물속에 잠길 줄도 아는 그런 판단력을 가진 단계입니다. 바로 약용(躍龍)입니다.
‘혹약재연(或躍在淵)이니 무구(无咎)니라.’
‘용은 뛰어오르기도 하고 잠시 연못 속으로 들어가 숨기도 하니 남에게 욕을 먹지 않을 것이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안 좋으면 잠시 물러나기도 하는 현명함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비룡(飛龍)입니다. 힘차게 하늘을 솟구쳐 오르는 용이지요.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니 이견대인(利見大人)이니라.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기에 이롭다.’는 뜻입니다. 정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는 최고의 단계입니다. 저 구만리 창천을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사람의 인생에 가장 클라이맥스라고나 할까요?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는 항룡(亢龍)입니다.
항룡은 가장 높이 올라간 용입니다.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으니 결국 내려올 수밖에 없는 형국이지요. 이 때 용은 눈물을 흘리며 후회를 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용의 눈물’이란 것이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가장 높이 올라간 용이 후회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의 ‘항룡유회(亢龍有悔)’란 말이 바로 그것인데요. 항룡(亢龍)에서 항(亢)은 ‘가장 높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항룡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을 은유하는 용어입니다. 그런 용이 결국은 후회가 있을 것이다.
있을 유(有)자 후회할 회(悔)자 유회(有悔)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는 누구나 올라가고 싶은 자리이지만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기 때문에 결국 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사물의 발전 전화 원리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주역의 한 인간의 운명론을 들으시면서 여러분은 어떤 단계라고 생각하십니까?
노자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져 교만하다면 그것은 스스로에게 허물이 될 것이다. 내가 성공을 이루었다면 그 성공에게서 물러나야 한다. 이것이 하늘의 도인 것이다. 富貴而驕는 自遺其咎니 功遂身退가 天之道니라.
성공을 이루고 그 성공에서 물러서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구나 성공을 자랑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그러나 그 성공을 누리려 하다가 결국 높이 올라간 항룡이 되어 후회의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초심을 잊지 않고 잠용의 모습으로 돌아갈 줄 아는 지혜. 우주의 진행법칙, 주역을 깨친 현명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넷향기님(http://www.nethyangki.net/)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맹자의 마음론, 우산지목(牛山之木)

맹자의 마음론, 우산지목(牛山之木)
박재희

세상을 살다보면 정말 이해 못할 사람들의 이해 못할 행동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저럴 수가 없는데...’라며 인간에 대한 불신과 함께 허탈한 쓴 웃음을 지어 보신 분들 많으실 겁니다. 인간은 정말 원래부터 악한 존재였을까요? 아니면 이 풍진 세상이 그토록 악하게 만든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고민과 논의는 춘추전국시대 맹자가 살던 시대에도 맹렬하게 벌어졌던 논쟁 중에 하나였습니다. 순자의 성악설과 맹자의 성선설. 뭐 여러분들 많이 들어보신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맹자의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는 논리를 한 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착하다는 믿음이야 말로 어떤 사람을 끝까지 신뢰하고 포기 하지 않는 심리적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맹자가 말하는 논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인간들은 원래 착하게 태어났다. 그런데 모진 풍파와 세월이 인간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악하게 만들었다.

최고의 투계가 되는 법

최고의 투계가 되는 법
박재희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통제할 줄 알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빛나는 광채나 매서운 눈초리를 보여주지 않더라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언가 근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사람의 모습. 동양에서는 이런 사람의 모습을 목계지덕(木鷄之德)을 가졌다라고 합니다.

목계란 나무로 만든 닭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무로 만든 닭처럼 완전히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의 그 능력이 바로 목계지덕이란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장자의 달생<達生>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왕이 투계를 좋아하여 기성자(紀?子)란 사람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구해 최고의 투계로 만들기 위한 훈련을 맡겼다고 합니다. 기성자는 당시 최고의 투계 사육사였습니다. 맡긴지 십 일이 지나고 나서 왕이 기성자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맡긴 닭이 싸우기에 충분한가?”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긴 하지만 얼마나 교만한지 아직 자신이 최고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 교만을 떨치지 않는 한 투계용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虛狡而恃氣라)”

빌 허(虛)자에 교만할 교(狡)자, 믿을 시(恃)자에 기운 기(氣)자. 그러니까 헛된 교만과 기운을 믿고 뽐내는 자세를 버리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열흘이 지나 왕이 또 물었을 때 투계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이 소리와 그림자에 너무 쉽게 반응하는 그 조급증을 버려야 합니다.(猶應嚮景).” 여기서 ‘향경’은 소리 향자에 그림자 경. 그러니까 상대방의 소리와 그림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조급함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것이지요.

또 십 일이 지나 왕이 또 묻자 “아직 멀었습니다. 조급함을 버렸지만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그 눈초리를 버려야 합니다.(疾視而盛氣)” 이 뜻은 상대방을 질시하는 공격적인 눈초리를 못 버렸다는 뜻입니다.

또 십 일이 지나고 또 묻자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어깨도 풀렸고 눈도 풀렸고 어떤 반응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제 완전히 마음의 평형을 찾았습니다. 마치 나무와 같은 목계(木鷄)가 되었습니다(望之似木鷄矣). 닭의 덕이 완전해 졌습니다(其德全矣) 이제는 이 닭을 보면 어느 닭이라도 그 모습만 봐도 도망갈 것입니다”

장자의 이 고사에서 말하는 가장 최고의 투계는 목계(木鷄)입니다.
자신이 제일이라는 교만함을 버리고, 남의 소리와 위협에 쉽게 반응하지 않으며,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인 눈초리를 버린 나무처럼 깎아 만든 목계는 인간으로 말하면 완전한 자아의 성취와 평정심을 이룬 성공하는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광채와 능력을 상대방에게 드러내지 않기에 그 빛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욱 빛날 수 있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자신의 광채를 누그러뜨리고 이 풍진 세상의 눈높이와 함께 하라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겸손함입니다.

화, 온화할 화에 빛 광, 당신의 그 빛을 누그러 뜨리세요. 같을 동,에 세속 진, 세속에 눈 높이를 맞추세요.

상대방의 행동에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강자의 여유로 맞이하기에 그 여유는 조직을 든든하게 만듭니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부동여산(不動如山)의 여유입니다.

함부로 상대방을 위협하는 눈초리를 보이지 않기에 그 마음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외경을 느끼게 만듭니다.
노자의 부드러움과 그 유약함이 결국 강하고 센 것을 이길 것이라는 유약승강강(柔弱勝强剛)의 부드러움입니다. 교만과 조급함, 그리고 공격적인 눈초리를 완전히 평정한 리더의 모습, 목계지덕(木鷄之德)을 가진 우리들이 바라는 이 시대의 진정한 성공하는 사람의 모습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넷향기(http://www.nethyangki.net/)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진정한 리더의 모습. 대기만성(大器晩成)

진정한 리더의 모습. 대기만성(大器晩成)
박재희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있습니다.

글자 뜻대로 해석하면 대기(大器) - 큰 그릇은, 만성(晩成) - 오랜 시간이 걸려야 완성된다. 조직에서 유능한 인재 하나를 키우고 만드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뜻으로 우리 주변에서 자주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이 대기만성의 철학은 원래 그런 뜻으로만 쓰인 것은 아닙니다. 노자의 도덕경. 당시 군주들에게 리더십을 강의한 책인데요. 대기만성할 때 대기(大器)의 큰 그릇은 그 당시의 리더들, 즉 군주를 의미하고 만성(晩成)의 만(晩)은 늦을 만자가 아니라 날일(日) 자를 뺀, 면할 면(免) 부정의 뜻으로 쓰였던 글자입니다. 대기만성(大器晩成), 그러니까 정말 큰 지도자는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즉 큰 그릇은 완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도 세상에서 제일 큰 그릇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릇일 겁니다.

이미 제일 큰 그릇이 완성되었다고 확정할 때 그 그릇보다 더 큰 크기의 그릇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완성된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단한 자기 계발과 노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무한의 모습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정말 큰 그릇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기만성의 본래 뜻입니다.

옛날에 한 번 만들어진 모습으로 평생을 변화 없이 산다는 것, 물론 아름답고 편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세상으로 보고, 새로운 마인드로 사람을 대하는 모습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스펀지처럼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은 무한한 존경심을 갖게 되고 아울러 자기반성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대기만성. ‘큰 그릇은 완성이 없다.’ 리더에게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내 크기를 키워나가라고 혁신하라는 충고의 말입니다.

‘대학(大學)’이란 고전에도 탕(湯) 임금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대기만성의 혁신철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진실로 오늘 하루가 새로웠다면(苟日新이어든)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며(日日新하고) 또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又日新하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신(日新)의 철학입니다.

탕(湯) 임금은 중국 고대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은(殷)나라를 세운 군주였습니다.

혁명의 주체이자 장군이었던 그는 매일 저녁 목욕하는 목욕통에 이 일신(日新)이라는 글을 새겨 넣고 몸을 씻을 때마다 자신에게 날마다 새로워지라고 주문을 외웠던 것입니다.

‘어제의 모습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내가 날마다 새로워 져야 내 주변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 일명 ‘대학’에서 백성들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신민(新民)’의 개념입니다. 지도자가 매일같이 새로워야 백성들도 새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지요. 제3공화국에서 사용하였던 ‘유신(維新)’이란 개념이나 ‘신민당(新民黨)’이란 정당 이름의 어원 모두 여기서 나온 개념입니다.

대기만성(大器晩成)과 일신(日新)은 원래 같은 의미입니다. 정말 큰 그릇이 되려면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날마다 새로워 져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도덕경에서는 대기만성과 함께 리더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는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大音希聲, 대음희성). 세상에서 가장 큰 형상은 형체가 보이지 않습니다(大象無形, 대상무형).’

위대한 지도자는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고, 완성도 없다는 이 구절들은 지도자의 모습은 영원한 변화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발상과 새로운 지식으로 무한의 모습을 만들어가라! 완성된 모습, 정해진 소리, 보이는 형체에 머물지 마라! 큰 그릇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당신이 날마다 새롭게 변해야 당신의 주변 사람들이 새롭게 변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수천 년 동안 동양 역사를 통해 흐르는 날마다 혁신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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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고궁 (君子固窮)

군자고궁(君子固窮)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조선시대 서화가이자 실학자였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문학가였다.

특히 서화에 능했던 김정희 선생은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대성시켰으며 예서 행서의 새로운 전형을 남긴 분으로도 유명하다. 제주도 유배를 포함하여 다양한 인생 역정을 겪었던 추사 김정희 선생, 그가 1844년 제주도 유배시절 그의 제자 이상적에게 준 그림 ‘세한도(歲寒圖)’는 보물 180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눈 내린 추운 겨울, 엄동설한에도 시들지 않고 서있는 소나무(松)와 잣나무(柏) 그림은 우리에게 어려운 시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상이 서려 있다.

세한에는 추사가 직접 쓴 글이 있는데 그 글귀 속에는 논어의 한 구절이 들어가 있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세월이 추워진 연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

세탁연후지군자지불변(世濁然後知君子之不變)

세상이 추워지고 온통 눈으로 뒤 덮여 추위와 바람만이 가득할 때, 그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푸름을 잊지 않고 서 있는 소나무의 기상을 그린 세한도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사람은 위기가 닥쳐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평소에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정감 많은 사람이 위기에 닥치면 전전긍긍 어찌할 줄 모르고, 의리와 신념을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 어떤 나무가 정말 강한 나무인지 알듯이 어렵고 힘든 위기상황은 그 사람의 정신력과 위기대응지수를 알게 해 주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논어(論語)에 보면 군자(君子)는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사람이라 하고(君子固窮), 소인(小人)은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고 넘쳐버리는 사람(小人窮濫)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와 세상을 주유(周遊)할 때 진(陳)나라에서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이하였다. 제자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대부분 병이 들었고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다. 이런 궁한 상황에서 공자의 다혈질 제자 자로(子路)는 공자를 만나 이렇게 따졌다. “선생님! 군자도 이렇게 궁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까?”

자로의 이 물음 속에는 공자를 믿고 따르는 아무 죄 없는 제자들이 왜 이런 힘든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를 공자에게 따져 묻는 것이었다. 공자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였다.

“군자는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사람이다(君子固窮). 그러나 소인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곧 원칙을 버리고 넘치게 되지(小人窮斯濫).”

공자의 이 말 속에는 어려움 속에 대처하는 두 가지 인간의 전형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논리가 있다.

어려움(窮), 그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의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궁(窮)한 상황에서 더욱 단단해(固) 질 것인가? 아니면 넘쳐(濫) 흘러 이성을 잃고 우왕좌왕 할 것인가?

성공한 사람들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버텨낸 고궁(固窮)의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역경이 사람을 더욱 강하게 한다.

주변의 성공한 분들은 추위 속에서 견뎌 낸 소나무 처럼 잣나무 처럼 역경 속에서 절대로 굴하지 않고 묵묵히 위기를 겪어 내신 분들이다!!

군자고궁!!!

감사합니다. 박재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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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향기(postmaster@nethyangki.net)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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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固窮(군자고궁) |

노자의 생선구이 리더십

노자의 생선구이 리더십
박재희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수많은 제후가 서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처절한 경쟁을 벌이던 시대. 우리가 사는 21세기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다이내믹한 경쟁과 생존이 화두였던 이 시대는 난세였던 만큼 생존에 대한 대안도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수많은 전문가가 쏟아져 나와 나름대로 그 시대를 분석하고 생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서로 옳다고 주장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였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이 시대만큼 대안도 많았던 시대도 없었습니다.

그중에서 도가(道家)라는 중국문화의 한 기둥을 세운 사람이 노자(老子)입니다. 노자의 노(老)는 우리가 노형(老兄) 하는 식의 존칭어이며 원래 성은 이(李) 씨고 귀가 크다고 해서 이름은 이(耳)였습니다. 이이(李耳). 그는 주나라 황실의 국립도서관장직에 있다가 요즘으로 말하면 정리해고되어 권력에서 멀어지며 낙향하는 몰락한 지식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지면서 5천여 글자의 책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나라 무제 때 역사가 사마천은 적고 있습니다. 그 책이 바로 도덕경이며 도덕경의 핵심 내용은 리더십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노자는 조용한 리더십의 대가입니다. ‘리더는 말을 아껴야 한다. 말을 할수록 그 말에 발목이 잡힌다(多言數窮).’, ‘리더는 물처럼 자신을 낮추고, 모든 공을 신하들에게 돌려야 한다. 내가 공을 누리려 하면 신하들이 떠나게 된다(功成身退).’, ‘리더는 신하들을 다스릴 때 스스로 할 수 있는 무위(無爲)의 리더십을 펼쳐야 한다. 자꾸 직접 간섭하고 강요하면 그들은 반발할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無爲而無不治).’ 이런 도덕경의 메시지는 수천 년간 중국 황제들의 조용한 리더십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하는 조용한 리더십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위(無爲)의 리더십입니다.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조직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라!’는 적극적인 의미의 표현입니다. 사실 일 안 하는 직원에게 일하라고 소리 지르는 것보다 그 직원이 자신의 역량과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리더로서 하기 힘든 적극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노자의 무위의 리더십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개념이 도덕경 60장에 나오는 약팽소선(若烹小鮮)입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治大國에 若烹小鮮이라. 해석하면 ‘큰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는 작은 생선 굽는 것처럼 조직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조그만 생선을 구워보신 분이라면 노자의 이 메시지는 금방 이해가 될 겁니다. 조그만 생선을 구울 때 가장 최악의 방법이 불을 세게 높이고 빨리 안 익는다고 이리저리 뒤집는 것입니다. 조그만 생선은 스스로 익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을 때 가장 완벽하게 익습니다. 일 못 하는 직원을 들볶고 무능하다고 욕하기보다는 그들이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직장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 공부 못하는 아이를 들볶기보다는 그 아이가 공부할 수 있는 집안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노자의 무위(無爲)철학의 핵심입니다.

이 조직은 내 인생을 걸어볼 가치가 있다. 학벌과 상관없이 누구나 노력하면 회사는 반드시 보상해 준다. 이런 문화가 있는 회사라면 손자병법의 말처럼 ‘병사들은 공격하지 말라고 해도 공격할 것이오, 싸우지 말라고 해도 목숨을 걸고 적을 향해 뛰어가는’ 최상의 직원들이 될 것입니다.

유능한 리더는 직원들의 업무를 시시콜콜 간섭하거나 그들의 무능을 탓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직원이 최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업의 문화와 시스템을 만들어 주는 사람 이것이 진정 노자가 꿈꾸는 무위(無爲)의 리더십입니다. 소리 지르며 윽박지르기보다는 그들의 열정을 끌어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라!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는 조그만 생선을 굽듯이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약팽소선의 원칙. 비록 생선 굽는 이야기로 조직원들의 피로감을 덜라고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조직의 관리자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절실히 보여주는 지도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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