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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장군과 두 개의 동상

맥아더장군과 두 개의 동상

마닐라 항구를 떠난 선박은 풍선주머니 모양의 마닐라만 입구를 향해 남쪽으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스페인 식민지를 거쳐 인구 8천 만 명의 나라로 커진 필리핀. 그 중심지로 2천만 명이 모여 살면서 오늘의 역사를 이어 오는 곳, 하지만 마닐라는 내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가난과 부패의 구름 속에 가리워져 있는 느낌이다. 아시아의 최선진국에서 50년 만에 최빈국으로 전락한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멀어지는 뱃길에서 돌아보는 항구의 빌딩들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2시간 만에 도착한 코레히도르 섬은 올챙이모양으로 길게 누워 좁은 마닐라만 수로의 천혜의 파수꾼 역할을 맡고 있는 듯이 살아있다. 열대 우림 속으로 지프니(소형지프를 개조해 만든 필리핀의 대중버스)를 타고 들어가니 1890년 미국-스페인전쟁 때 구축된 대포와 방어진지의 잔해들이 나타난다. 쓰러진 시멘트 구조물속으로 철근은 녹슬고 잡초는 우거져 무용한 세월을 벗하고 있다. 곧이어 터진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뺏고 뺏기는 섬의 운명을 예견했을까. 군병참기지, 탄약고, 둔중한 대포 등이 흐르는 앞바다의 해류를 바라보면서 소리 없이 스러져가고 있다. 1마일이 넘는 군인들의 막사건물은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120년 전 미국 일리노이 병기창에서 제작된 육중한 해안 포의 포신만은 아직도 위용을 잃지 않고 있다.

1942년 맥아더장군은 이곳에서 일본군의 집중공습을 받고 병력을 모두 잃은 채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 소형보트로 도망쳤다. 치욕적인 패배를 가슴에 안고 “I shall return(나는 반드시 돌아온다)”을 곱씹으며 새벽시간에 야반도주한 셈이다. 마닐라를 포기하고 그는 호주근해까지 밀려 내려갔다. 절치부심하던 미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인도네시아부터 서서히 북상하면서 일본군을 차례로 제압해 나갔다. 괌을 비롯한 남양군도를 손에 넣은 여세를 몰아 말레이 반도에서 승기를 잡고 드디어 맥아더의 한이 서린 마닐라만 전투의 포성을 쏘아 올렸다.

맥아더는 휘하의 최정예부대 제6군 7함대를 앞세우며 코레히도르 섬으로 진격했다. 절묘한 지형을 타고난 요새여서 3년 전 일본군을 괴롭혔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탈환하는 미군이 몇 배 애를 먹고 사상자도 많이 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그는 1945년 드디어 이 섬의 승전을 발판으로 마닐라 만을 확보하고 필리핀을 손에 넣는다. 세계 전쟁 사에 콘스탄티노플 공격, 로마전투와 함께 역사를 바꾼 대 격전에 기록될 정도로 코레히도르 전투는 치열했다.

침략자 일본의 불장난은 원폭투하로 1945년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맥아더는 승리자로 일 왕의 항복문서를 받아낸다. 필리핀과 한국이 동시에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그런 맥아더를 독립의 영웅으로 기리고 있다. 태평양전쟁의 승리와 맥아더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종전 후 필리핀 정부는 폐허가 된 코레히도르 섬을 단장하고 폭격으로 부서진 군 시설들을 보존해 이곳을 전쟁기념관으로 만들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1997년 한국의 국방장관을 비롯해 슐츠 미 국무장관, 카터 전 미국대통령,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등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전시돼 있다.

맥아더가 도주했던 조그만 선착장에는 전쟁영웅으로 다시 돌아온 그의 동상을 세워 업적을 기리고 있다. 멀리 마닐라만으로 향한 그의 시선이 아직도 살아 있는듯하다. 갖은 만행으로 부정한 전쟁을 벌인 “Japanes monkey. 일본군”을 몰아내고 필리핀의 독립을 가져다 준 장본인으로 추앙한다. 코레히도르 섬을 돌아보고 떠나는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동상 앞에서 가슴 깊은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몇 년 후 한국전쟁이 터졌다. 맥아더는 다시 유엔군 사령관으로 참전해 갖은 희생 끝에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을 구한다. 중공군을 격퇴하기 위해 만주일대까지 진격해서 원폭을 투하해 이 기회에 공산주의자들을 쓸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는 확전을 경계하던 트루먼의 소환으로 눈물의 전역을 하고 만다. 맥아더는 결국 일본과 북한으로부터 한국을 두 번이나 구출한 셈이다.

“나는 결코 전쟁 광이 아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없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일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맥아더가 1951년 4월9일 미 의회 고별연설에서 행한 내용이다. 승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패배한다는 의미, 전 세계 전장을 누빈 강인한 군인정신의 회한을 담은 연설을 마지막으로 그는 야인으로 돌아갔다. 미-스페인 전쟁의 영웅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아들로 태어나 미 육사를 수석졸업하고 최연소 4성, 5성 장군으로 전역과 복귀를 반복하면서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 클린턴 대통령이 그의 고향 아칸소 리틀록 출신가운데 가장 존경했던 인물, 맥아더는 한국을 그리워하면서 1964년 워싱턴 DC에서 84세로 타계했다.

인천자유공원에는 맥아더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힘들었을 때 그의 용기와 희생이 녹아 든 연합군의 노고를 잊지 않기 위함이리라. 그런데 종전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 땅의 급진주의자들과 많은 젊은이들은 맥아더를 깎아 내리고 한반도를 두 동강낸 장본인이라며 동상에 밧줄을 걸기 까지 했다. 고마움을 표시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은혜를 내던지는 철부지 행동 속에 분단 60년의 현실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 국방장관이 최근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Known and Unknown)’이라는 회고록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군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자유와 경제적 성공을 일군 한국이 지금은 ‘역사적 기억상실증(historical amnesia)’에 빠져있음을 느낀다”고 쓰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북한 수용소에 갇혀 있지 않은 것은 많은 미국청년들이 1950년 잊혀진 전쟁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 술회했다.

필리핀의 “잊혀지지 않는 맥아더”와 한국의 “잊으려고 노력하는 맥아더” 그 두 개의 동상이 서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onsumertim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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