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기 좋은 특별한 날은 없다.
중요한 일을 미루는 것은 불행한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실천을 미룬다. 그러면서 새해가 되면, 생일날부터, 결혼기념일부터 시작하겠다고 다짐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완벽한 타이밍은 없다. 금연을 하기에 가장 좋은 날은 없다. 공부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도 없다. 실천하기 가장 좋은 날은 ‘오늘’이고 실행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지금’이다.
- 이민규, ‘실행이 답이다.’에서
변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나중에, 다른 데서’ 이며, 성공의 가장 확실한 디딤돌은 ‘지금 여기서 Now & here'입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고, 시작은 아무리 늦어도 빠른 것입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라고 웅변합니다.
받은 글입니다.
Showing posts with label 실행.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실행. Show all posts
꿀먹은 벙어리 새
작은 새들이 사는 숲에는 한 개의 큰 나무가 서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작은 새들은 그 나무를 신령스럽게 생각하여 감히 나무 가지에 앉지 않았다.
그 고목나무는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새들은 그 나무 구멍 속에 무지무지하게 큰 구렁이가 산다고 생각하였다.
작은 새들은 그 구렁이를 나무신이라 믿고, 일 년에 한 번씩 그 나무 밑에서 큰 제사를 지냈다. 구렁이가 하늘로 올라가 용이 되기를 빌었다.
어느 날 새들이 사는 숲으로 두 마리의 큰 새가 날아들었다. 그 새들은 고목나무에 날아와 각자 두 개의 둥지를 틀었다.
작은 새들 중에서 가장 늙은 새가 두 마리의 큰 새 앞에 나타나 말하였다.
“이 나무에 둥지를 틀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냐?”
두 눈이 부리부리한 큰 새가 물었다.
“신령스런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무에는 용이 되려는 큰 구렁이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무에 둥지를 틀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
작은 새들 중 가장 늙은 새가 설명하였다.
“그 구렁이들을 네 눈으로 직접 보았느냐?”
“아니,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우리 새들이 사는 숲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깁니다.”
“보지도 못한 것을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너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로구나. 벌건 대낮에 가시나무에 찔려 애꾸눈이 된 저 멍청한 새와 다를 바가 없군.”
두 눈이 부리부리한 큰 새가 바로 옆에 둥지를 튼 큰 새를 가리켰다. 정말 그 큰 새는 눈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 대신에 두 개의 큰 귀를 가지고 있었다.
“애꾸눈이라고 했나? 그대는 일목요연(一目瞭然)이란 말도 모르는 모양이로군.”
두 귀가 큰 새가 한 마디 하고는 곧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높은 산에 올라가 도를 닦고 내려온 성자들이다. 성자들은 구렁이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두 눈이 부리부리한 큰 새가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저 고목나무 구멍 속에 들어가 구렁이가 살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있겠군요?”
작은 새들 중 가장 늙은 새가 물었다.
“물론이지. 우리는 한 달 동안 먹지 않고도 고목나무 구멍 속에서 도를 닦을 수 있다. 어이, 애꾸눈! 이 기회에 누가 더 도를 많이 닦았는지 내기해 보지 않겠나?”
두 귀가 큰 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두 마리의 큰 새는 고목나무 구멍 속에 들어가 한 달 동안 나오지 않았다. 작은 새들은 그 새들이 구렁이에게 물려죽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후 두 마리의 큰 새가 구멍 속에서 멀쩡하게 살아나왔다. 작은 새들은 그 두 마리의 큰 새들을 성자로 모시기로 하였다.
“우리들에게 도(道)의 참모습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작은 새들을 큰 나무 주위로 불러 모은 후, 가장 늙은 새가 두 마리의 큰 새에게 청하였다.
“도란 지혜로운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덕목이다. 저 고목나무 구멍 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동안 구렁이가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구렁이는 감히 내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였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바로 내가 도를 닦은 성자이기 때문이다.”
두 눈이 부리부리한 큰 새가 말하였다.
“그것이 참말입니까? 그럼, 그 옆에 계신 성자께서도 구렁이를 보았단 말입니까?”
작은 새들 중 가장 늙은 새가 이번에는 두 귀가 큰 새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 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만 꾹 감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애꾸눈은 구렁이가 나타나자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기만 하였다. 그리고 너무 무서운 나머지 입술이 붙어 아주 벙어리가 되어 버렸지. 내 도력 덕분에 겨우 목숨을 구한 것만도 다행스런 일이야.”
두 눈이 부리부리한 새가 대신 말하였다.
그때 눈을 꾹 감고 있던 두 귀가 큰 새는 어디선가 불씨를 물어다 자신의 둥지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앉아 기도를 드렸다. 둥지가 불에 다 탈 때까지 그 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새는 타지 않고 오히려 몸에서 불보다 더 밝고 투명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둥지가 다 타고나자 그 새는 불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새의 꼬리가 그리고 지나간 자국이 마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말이 아닌 몸으로 도를 보여주었군!”
작은 새들 중 가장 늙은 새가 감탄하여 소리쳤다.
“과연 도가 깊은 성자로구나!”
작은 새들도 합창을 하듯 말하였다.
“저건 도를 닦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도술이다.”
두 눈이 부리부리한 큰 새도 자신의 둥지에 불을 지르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잠시 후에 그 새는 몸에 불이 붙어 새카맣게 타서 죽어버리고 말았다.
옮긴 글입니다. 말만 앞서지 말라는 우화입니다.
그 고목나무는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새들은 그 나무 구멍 속에 무지무지하게 큰 구렁이가 산다고 생각하였다.
작은 새들은 그 구렁이를 나무신이라 믿고, 일 년에 한 번씩 그 나무 밑에서 큰 제사를 지냈다. 구렁이가 하늘로 올라가 용이 되기를 빌었다.
어느 날 새들이 사는 숲으로 두 마리의 큰 새가 날아들었다. 그 새들은 고목나무에 날아와 각자 두 개의 둥지를 틀었다.
작은 새들 중에서 가장 늙은 새가 두 마리의 큰 새 앞에 나타나 말하였다.
“이 나무에 둥지를 틀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냐?”
두 눈이 부리부리한 큰 새가 물었다.
“신령스런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무에는 용이 되려는 큰 구렁이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무에 둥지를 틀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
작은 새들 중 가장 늙은 새가 설명하였다.
“그 구렁이들을 네 눈으로 직접 보았느냐?”
“아니,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우리 새들이 사는 숲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깁니다.”
“보지도 못한 것을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너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로구나. 벌건 대낮에 가시나무에 찔려 애꾸눈이 된 저 멍청한 새와 다를 바가 없군.”
두 눈이 부리부리한 큰 새가 바로 옆에 둥지를 튼 큰 새를 가리켰다. 정말 그 큰 새는 눈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 대신에 두 개의 큰 귀를 가지고 있었다.
“애꾸눈이라고 했나? 그대는 일목요연(一目瞭然)이란 말도 모르는 모양이로군.”
두 귀가 큰 새가 한 마디 하고는 곧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높은 산에 올라가 도를 닦고 내려온 성자들이다. 성자들은 구렁이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두 눈이 부리부리한 큰 새가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저 고목나무 구멍 속에 들어가 구렁이가 살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있겠군요?”
작은 새들 중 가장 늙은 새가 물었다.
“물론이지. 우리는 한 달 동안 먹지 않고도 고목나무 구멍 속에서 도를 닦을 수 있다. 어이, 애꾸눈! 이 기회에 누가 더 도를 많이 닦았는지 내기해 보지 않겠나?”
두 귀가 큰 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두 마리의 큰 새는 고목나무 구멍 속에 들어가 한 달 동안 나오지 않았다. 작은 새들은 그 새들이 구렁이에게 물려죽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후 두 마리의 큰 새가 구멍 속에서 멀쩡하게 살아나왔다. 작은 새들은 그 두 마리의 큰 새들을 성자로 모시기로 하였다.
“우리들에게 도(道)의 참모습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작은 새들을 큰 나무 주위로 불러 모은 후, 가장 늙은 새가 두 마리의 큰 새에게 청하였다.
“도란 지혜로운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덕목이다. 저 고목나무 구멍 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동안 구렁이가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구렁이는 감히 내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였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바로 내가 도를 닦은 성자이기 때문이다.”
두 눈이 부리부리한 큰 새가 말하였다.
“그것이 참말입니까? 그럼, 그 옆에 계신 성자께서도 구렁이를 보았단 말입니까?”
작은 새들 중 가장 늙은 새가 이번에는 두 귀가 큰 새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 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만 꾹 감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애꾸눈은 구렁이가 나타나자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기만 하였다. 그리고 너무 무서운 나머지 입술이 붙어 아주 벙어리가 되어 버렸지. 내 도력 덕분에 겨우 목숨을 구한 것만도 다행스런 일이야.”
두 눈이 부리부리한 새가 대신 말하였다.
그때 눈을 꾹 감고 있던 두 귀가 큰 새는 어디선가 불씨를 물어다 자신의 둥지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앉아 기도를 드렸다. 둥지가 불에 다 탈 때까지 그 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새는 타지 않고 오히려 몸에서 불보다 더 밝고 투명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둥지가 다 타고나자 그 새는 불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새의 꼬리가 그리고 지나간 자국이 마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말이 아닌 몸으로 도를 보여주었군!”
작은 새들 중 가장 늙은 새가 감탄하여 소리쳤다.
“과연 도가 깊은 성자로구나!”
작은 새들도 합창을 하듯 말하였다.
“저건 도를 닦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도술이다.”
두 눈이 부리부리한 큰 새도 자신의 둥지에 불을 지르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잠시 후에 그 새는 몸에 불이 붙어 새카맣게 타서 죽어버리고 말았다.
옮긴 글입니다. 말만 앞서지 말라는 우화입니다.
왜? 젊음을 열광하는가?
왜? 젊음을 열광하는가?
왜? 우리는 역동적인 사람을 주시하는가?
왜? 열정의 시대를 원하가?
시대가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몽골의 제왕 톤유쿠크는 '정착은 죽음이다. 움직이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고 했다.
망설이는 시간으로 생산은 통곡 하고 주저하는 기회가 가슴을 친다.
사람들이여! 드디어 움직여라. 시대는 행동하는 자를 주시한다.
움직이는 자가 열매를 거두고 움직이는 자가 먹이를 찾아내고 행동의 선두자가 세상을 이끈다.
생각을 움직여라! 용기를 움직여라! 행동을 움직여라!
두 팔을 벌려 소리를 쳐내라. 성공의 불꽃은 움직이는 자의 것이다.
뛰고 또 뛰어라. 지금 당장, 그 움직임을 시작하라!
- 소 천 -
살아있는 증거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공자의 결과는 먼저 움직임의 결과입니다. 그 반경이 넓은 사람일수록 성공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 세계는 움직이는 자에 의해 지배되어 왔습니다. -
받은 글입니다.
왜? 우리는 역동적인 사람을 주시하는가?
왜? 열정의 시대를 원하가?
시대가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몽골의 제왕 톤유쿠크는 '정착은 죽음이다. 움직이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고 했다.
망설이는 시간으로 생산은 통곡 하고 주저하는 기회가 가슴을 친다.
사람들이여! 드디어 움직여라. 시대는 행동하는 자를 주시한다.
움직이는 자가 열매를 거두고 움직이는 자가 먹이를 찾아내고 행동의 선두자가 세상을 이끈다.
생각을 움직여라! 용기를 움직여라! 행동을 움직여라!
두 팔을 벌려 소리를 쳐내라. 성공의 불꽃은 움직이는 자의 것이다.
뛰고 또 뛰어라. 지금 당장, 그 움직임을 시작하라!
- 소 천 -
살아있는 증거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공자의 결과는 먼저 움직임의 결과입니다. 그 반경이 넓은 사람일수록 성공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 세계는 움직이는 자에 의해 지배되어 왔습니다. -
받은 글입니다.
깨달음과 게으름
깨달음과 게으름
한고조(寒苦鳥)는 불경 속에 나오는 상상의 새다.
히말라야의 설산(雪山)에 산다고 해서
설산조(雪山鳥)라고도 부르는데
둥지를 틀지 않기 때문에
밤이면 사나운 눈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온몸이 얼어붙는 괴로움을 겪는다.
밤이면 '날이 밝으면 꼭 아늑한 둥지를 짓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밤이 가고 날이 밝으면
꽁꽁 얼어붙은 몸을 햇볕에 녹이며 게으름을 피우다가
또 다시 밤이 오면 뼈마디가 얼어붙는 고통을 당하곤 한다.
깨달음을 얻어도 게으름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다른 나라의 지진 피해를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우리는 정작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가 걱정스러워진다.
받은 글입니다. 설산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나의 모습. 실행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한고조(寒苦鳥)는 불경 속에 나오는 상상의 새다.
히말라야의 설산(雪山)에 산다고 해서
설산조(雪山鳥)라고도 부르는데
둥지를 틀지 않기 때문에
밤이면 사나운 눈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온몸이 얼어붙는 괴로움을 겪는다.
밤이면 '날이 밝으면 꼭 아늑한 둥지를 짓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밤이 가고 날이 밝으면
꽁꽁 얼어붙은 몸을 햇볕에 녹이며 게으름을 피우다가
또 다시 밤이 오면 뼈마디가 얼어붙는 고통을 당하곤 한다.
깨달음을 얻어도 게으름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다른 나라의 지진 피해를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우리는 정작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가 걱정스러워진다.
받은 글입니다. 설산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나의 모습. 실행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