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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청소를 하는 노인

요즘 친일 진상규명 문제를 놓고 정치권 안팎이 시끄럽다. 한쪽에선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려고 하고, 또 한쪽에선 애써 그것을 들추어내어 세상에 밝히려고 한다. 숨기려는 것이나 들추어내려는 것이나 다 부끄러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실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부끄러운 사람들의 참회가 아닐까 싶다.

참회는 과거의 부끄러움을 세상에 밝히는 일이며, 그 죄를 뒤늦게나마 씻어내는 일이다.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어내는 일은 마음의 때를 벗겨내는 일이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 몸에 붙은 때는 물로 씻어내면 되지만 마음의 때는 ‘참회’라는 고통을 전제하지 않고는 씻어내기 어려운 것이다. 참회는 스스로의 몸에 채찍을 가하는 일이고, 만천하에 알려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날아오는 돌을 스스로 맞는 일이다. 아니 그냥 맞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감내하며 끝없이 자신의 과거 잘못을 속죄해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팔순 가까이 된 노인이 마을 청소를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벌써 10여 년 전부터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스스로 나서서 마을 청소를 해오고 있다고 한다. 매일 새벽 하루도 쉬지 않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허리 굽혀 길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고, 가득 넘쳐나는 쓰레기통을 비우고, 떨어지는 낙엽을 모아 불태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청소하는 노인 때문에 그 마을은 아주 깨끗한 거리가 되었고, 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선 저절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입이 닳도록 노인을 칭송해마지 않았지만, 왜 그가 그토록 열심히 청소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텔레비전 뉴스 기자가 그 노인의 선행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무비 카메라를 휴대한 채 찾아간 모양이다. 뉴스의 화면은 먼저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차례로 듣고 나서, 그 증언의 사실 확인에 들어갔다. 즉 노인이 새벽부터 집에서 나와 어떻게 마을 청소를 하는지 그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노인의 손에는 빗자루와 쓰레받기, 그리고 쓰레기를 담을 비닐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그는 열심히 허리를 굽혀 빗자루 질을 하였고 쓰레기를 주워 구청에서 판매하는 청소용 비닐봉지에 담았다. 매일 청소를 하려면 그 비닐봉지 값만 해도 만만치 않을 듯싶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왜 이렇게 열심히 청소를 하십니까?”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댔다.

“마을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지요.”

노인은 허리를 펴며 밝게 웃었다.

“매일 이렇게 청소를 하면 힘들지 않습니까?”

“힘들어도 해야지요. 내 마음의 때를 닦으려면.”

노인은 ‘마음의 때’를 닦기 위해 매일 새벽 마을 청소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혹시 노인이 ‘청소’라는 행위를 통해 도를 닦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불교에선 스스로 불화로를 머리에 이고 고통을 견뎌냄으로써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벌써 외모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 노인은, 그런 고통을 견디는 방법의 하나로 ‘청소’라는 실천적인 화두를 통해 생활 속의 도를 닦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기자는 청소하는 노인의 앞길을 자꾸 가로막으며 끈질기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청소로 어떻게 마음의 때를 닦는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노인은 깊게 한숨을 쉬며 허리를 펴고 말했다.

“죄 갚음을 이런 식으로 해보자는 것이지요.”

“죄라니요?”

“일제시대 때 나는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일본어로 공부를 가르쳤다오. 학생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일경이 무서워 우리말도 못 쓰고 일본어로 교육을 시켰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요. 당시에는 일본 정부의 시책이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그래서 힘이 약한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스스로 면책이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나이 들어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어요. 당시 조선인 선생으로 조선 학생들에게 일본어로 공부를 가르친 것은 큰 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 일흔이 가까워서야 그 죄를 깊이 반성하고 참회하는 뜻에서 이렇게 매일 새벽 마을 청소를 하고 있답니다.”

노인의 얼굴은 참회하는 모습 그대로 숙연하였다. 그는 해방 후에도 계속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교장선생까지 지내다가 정년퇴임을 하였다고 했다. 해방 후 한국말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전에 일본어로 가르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 한 쪽에 무거운 추가 드리워지는 느낌이 종종 들었는데, 정년퇴임 후 집에서 쉬면서 조용히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다가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마을 청소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십여 년 청소를 하셨으니, 이제 그만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연로하셔서 힘에 부칠 텐데…….”

기자의 말에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아직 멀었어요. 이 목숨이 다 할 때까지 해도 모자랍니다.”

노인은 다시 허리를 굽혀 빗자루로 쓰레기를 주워 담기 시작하였다.

나는 텔레비전 뉴스로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뭔가 솜방망이 같은 것이 가슴을 콱 틀어막는 것 같은 뻐근함을 느꼈다. 그것은 감동인데, 동시에 아픔까지 수반하는 그런 짜릿함이었다.

이 세상 누구도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죄 한 번 짓지 않고 완벽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사람다운 냄새가 나지 않는다. 어쩌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짓기는 하되, 그것을 깊이 뉘우치는 사람에게서 오히려 더 사람다운 향기가 나는 법이다. 노인의 빗자루 질은 바로 자기 자신 속에 들어 있는 죄의 티끌들을 쓸어내는 마음 닦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


받은 글입니다.

마음의 때를 보면서 닦아내려 하지는 않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