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한 약속
여름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순백의 옥잠화(玉簪花)는 이름처럼 선녀의 눈부신 옥비녀를 닮은 꽃입니다. 피기 전의 모습이 비녀를 쏙 빼닮은 옥잠화를 볼 때면 아련한 어린 날의 풍경 하나 떠오릅니다.
나의 어머니는 이른 아침마다 거울 앞에 앉아 정성스레 머리 손질을 하셨습니다. 긴 머리를 곱게 빗어 쪽을 찐 뒤 값 싼 양은 비녀를 단정히 꽂아 마무리를 하신 뒤에야 식구들 아침밥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가곤 하셨지요.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의 머리에 꽂힌 낡은 양은 비녀가 안 되어 보였었는지 어느 날 나는 어머니께 이담에 크서 돈 벌면 금비녀를 사드리겠는 허튼 약속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내가 이뻐보였던지 당신은 금비녀 보다 옥비녀가 더 좋다며 나중에 커서 돈 많이 벌면 꼭 옥비녀를 사 달라시며 어린 제 머리를 오래도록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군에입대하여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어머니의 머리를 보고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습니다. 내가 군대 간 사이, 어머니는 긴 머리를 자르고 뽀글이 파마를 하신겁니다. 그렇게 해서 옥비녀를 사 드리겠다던 나의 약속은 영영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옥잠화를 볼 때마다
추억 속의 옥비녀가 제 가슴을 콕콕 찔러옵니다. 혹시 그대에겐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은 없으신가요?
글.사진 - 백승훈
사색의향기님(culppy@culppy.org)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