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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 된다

이웃이 된다

참되고 깨끗한 만남은 서로가 먼저 느끼는 바가 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일어나는 마음에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일어난 마음에는 반드시 체온이 실려 있어서 항상 제 온도를 유지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러서 잔정이라고도 하고 속정이라고도 하고 덧정이라고도 한다.

- 이문구의 ''까치 둥지가 보이는 동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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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란 말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자신은 남보다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거기서 거기, 즉 별로 차이가 안 난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요, 부모가 되어서든, 직장 상사가 되어서든 이 정도면 나는 잘한다고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대체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왜 자식들이 내 마음을 안 알아주는 것일까?
세상에 나정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사람들은 나를 멀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맹자>의 오십보백보이론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맹자가 살던 시대에 양혜왕(梁惠王)이란 지도자가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백성들에게 정치를 하고 있소. 하내(河內) 지방에 흉년이 들면 젊은 사람은 하동(河東)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고, 거동 못하는 늙은이와 아이들을 위해서는 하동에서 곡식을 가져다가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동에 기근이 들어도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오.

그러나 이웃나라 지도자가 정치하는 것을 살펴보니 나 같이 백성들에게 마음을 쓰는 자가 없는 것 같소.
그런데 도대체 이웃 나라의 백성들은 줄어들지 않고, 우리나라 백성들 또한 많아지지 않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양혜왕이 맹자에게 자문을 구한 내용입니다. 세금을 내고 부역을 담당하던 백성의 숫자가 국력이었던 시절, 양혜왕은 어째서 백성들이 자신의 나라로 몰려들지 않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왜 민심이 자기에게 쏠리지 않는지를 궁금해 했던 것인데요,
최선을 다해서 백성들을 위하여 정치를 하는데 왜 백성들이 나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느냐는 왕의 질문에 맹자는 오십보백보 이론으로 대답합니다. "왕께서는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비유해서 말씀드리지요.

전쟁터에서 한창 접전일 때 두 병사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질질 끌고 도망쳤습니다.
어떤 병사는 백 보를 도망가서 멈추고(或百步而後止) 어떤 병사는 오십 보를 도망가서 멈추었습니다(或五十步而後止). 그때 오십 보를 도망친 병사가 백 보를 도망친 병사를 보며 비웃고 나무랐다면 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쟁터에서 오십 보를 도망 간 것이든 백보를 도망간 것이든 도망간 거리만 다를 뿐이지 도망간 것은 똑같다는 이치를 아신다면 민심이 당신에게 몰리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왕의 정치나 이웃 나라 왕의 정치나 五十步百步(오십보백보)입니다.”

오십 보 도망 가놓고 백보 도망간 사람을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세상엔 많습니다.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남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보다 과대 포장하고 헐뜯는 것이 생존 무기가 되어 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무작정 다른 사람을 향해 비난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그런 문제점이 없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논어에서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비교하면서 군자는 모든 책임을 질 줄 알며, 자신에게 먼저 잘못을 묻는 사람이라 하고 있습니다. 즉 남의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자신의 잘못을 먼저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전쟁터에서 오십 보 도망간 병사가 백보 도망간 병사를 보고 웃었다는 맹자의 오십보백보 이야기가 오늘날 낮선 이야기 같지가 않습니다.

박재희였습니다.


From 넷향기(postmaster@nethyangki.net)

창의성은 고정관념에서 나온다

창의성은 고정관념에서 나온다
신동기

도시국가 로마의 영토 확장은 사실 공화정 시기(BC509-BC27년)에 대체로 마무리된다. 이 시기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그 다음 지중해 패권에 도전하여 성공한다. 이 지중해의 패권을 가르는 전쟁이 바로 ‘페니키아인과의 전쟁’이라는 의미의 포에니 전쟁(BC264-BC146년)이다.
그리스 지역은 지형이 험난해 농사를 지을만한 변변한 땅이 없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그리스인들은 배를 타고 지중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 농사를 지을만한 땅을 발견하면 그 곳에 정착해 나라를 만들었다. 그렇게 형성된 수많은 국가들이 바로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이다.
따라서 지중해 연안에 형성되어 있는 도시 국가들 대부분은 그리스 민족들이 만든 국가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아프리카 북안 튀니지 지역에 자리 잡은 카르타고는 예외였다.
팔레스타인 땅 연안지역에 일찍부터 문명을 이루었던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 북안 중부 지역에 BC12세기 무렵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바로 카르타고이다.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잡을 무렵인 BC3세기 무렵에는 이미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의 전성기가 지난 뒤로 당대 지중해 해상 최강국은 바로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와 로마와의 싸움은 참으로 우연히 시작되었다.
그 전 타렌툼(BC280-BC273년) 싸움도 그렇고 로마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연이 국가의 운명을 튼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한 국가의 역사나 개인의 삶의 과정 모두 항상 우연이라는 것이 작용한다.
그 우연을 유리한 환경으로 바꾸는 자는 주도권을 쥐게 되고 우연을 애써 무시하려 들거나 회피하려는 자는 기회를 잃거나 종속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는 지중해의 패권을 가르는 시칠리아 섬이 있다.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반도 사이가 바로 메시나 해협인데 이 해협의 폭이 좁은 곳은 불과 3.2km밖에 안된다.
좁은 해협인 만큼 물살이 빨라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이 해협에 괴물인 스킬라와 카리브디스가 살고 있어 오디세우스를 포함해 그리스 신화의 많은 영웅들이 여기에서 혼쭐이 난다.

포에니 전쟁이 일어날 때 시칠리아 섬 상황은 동북쪽에는 메시나라는 그리스계 폴리스 국가가 있었고, 동남쪽에는 같은 그리스계 시라쿠사라는 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섬 서쪽지역은 아그리젠토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라쿠사가 메시나를 공격해 와 메시나가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지배권을 확정짓는 타렌툼 전투(BC280-BC273년)를 끝낸 지 불과 9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로마가 일단 메시나와 시라쿠사의 싸움에 개입하게 되면 결국 지중해 최강 해상국인 카르타고와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메시나의 구원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시칠리아 섬 내의 균형이 깨져 섬 동쪽 지역까지 모두 카르타고가 차지하는 상황이 되면, 메시나 해협 불과 3.2km를 사이에 두고 더욱 강대해진 카르타고를 로마가 상대해야 되기 때문에 그것은 더더욱 위험한 일이었다.

좋은 안이 없으면 나쁘지 않은 안이 정답이다.
로마는 덜 위험한 상황, 단 몇%의 낮은 가능성이라도 승리를 얻을 수 있는 대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메시나의 구원 요청에 응하는 것이었다.

포에니 전쟁은 118년간에 걸쳐 진행되지만 118년 내내 싸웠던 것은 아니고 1차(BC264-BC241년), 2차(BC219-BC202년), 3차(BC149-BC146년)로 나누어 진행된다

1차 싸움에서는 11차례의 큰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 중에서 로마는 3번째, 6번째 그리고 10번째 싸움에서 패하고 나머지는 모두 승리한다.
이 1차 싸움 결과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가르는 시칠리아를 로마의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고, 로마의 힘을 보고 놀란 주변의 사르데냐, 코르시카와 같은 큰 섬들은 카르타고와의 동맹에서 로마의 동맹으로 돌아선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이 뭍에서만 싸워왔던 로마가 해상강국인 카르타고를 어떻게 해전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11차례 싸움이 해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육전도 있었고 해전도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둔 두 국가 간의 전쟁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해상 전투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애초부터 육전은 불가능한다

로마가 최강 해상국인 카르타고를 이긴 것은 이를테면 ‘고정관념’의 승리였다
첫 번째, 두 번째 육전에서 승리한 로마는 본격적인 해전은 아니지만 세 번째 싸움인 해전에서 해군담당 집정관인 스키피오가 리파리라는 섬을 점령했다 카르타고에 포로로 잡히고 함대는 급하게 메시나 항으로 후퇴하는 결과를 맞이한다.

이 때 로마 원로원은 후임 해군 담당 사령관을 새로 선임하지 않고 육군 담당 집정관인 두일리우스를 겸직으로 발령낸다. 갑작스럽게 해군까지 담당하게 된 두일리우스는 어떻게 하면 카르타고 해군을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한다.

로마는 육전에서는 50년 이상의 실전을 통해 천하무적의 전투력을 자랑하지만 해전은 이제 겨우 전투함을 건조해 배 방향키나 잡을 정도였다. 이 상태에서 카르타고와 맞붙는다는 것은 사실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두일리우스가 내린 결론은 로마군은 육전에 강하니 전투를 육전처럼 하면 될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나온 아이디어가 일명 까마귀발이었다.
뱃머리에 가까운 돛대에 무겁게 제작된 사다리를 함께 세워놓고 적함에 접근해 이 사다리를 상대방 배와 연결하여 다리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사다리는 180도 회전하게 만들어 적이 뒤에서만 오지 않으면 좌우 앞 어느 방향으로나 바로 떨어트려 두 배를 연결할 수 있도록 하고, 사다리 끝에는 날카로운 갈고리를 달아 한번 적의 갑판에 찍히면 절대 빠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기존의 육전 전투 방식 고수에 집착한 두일리우스의 아이디어는 기적을 낳았다.
해상 전투 경험이 전무한 로마군이 군선 수로만 해도 1.5배나 되는 해상강국 카르타고를 대파한 것이다.
카르타고는 이 전투에서 시칠리아 주둔 해상 병력의 1/3을 잃는 큰 손실을 본다

로마의 승인은 다름 아닌 해군 담당 집정관을 겸임한 육군 담당 집정관인 두일리우스의 이른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육전에서 잘 싸워왔으니까 이번 해전도 육전 식으로 해 보자는 고정관념이었다.
전투 환경을 육전처럼 바꿀 수만 있다면 해전에서도 로마가 이길 수 있다고 확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확신이 적중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고정된 사고방식이나 고정된 인식을 고정관념이라고 한다.
변화가 중요한 화두가 되고 빠른 속도가 미덕이 된 20세기 말 21세기 초 들어서는 개인과 조직의 경쟁력 확보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고정관념’을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위 ‘고정관념’이라는 어휘에 대한 부정적 의미만 제외한다면 고정된 사고방식이나 고정된 인식 자체는 사실 가치 중립적이다. 좋고 나쁘고 올바르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선악(善惡)이나 정부(正否)의 문제라면 고정된 사고방식이나 인식 틀 자체는 오히려 선이고 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정된 사고방식이나 고정된 인식이 없으면 세상 사람들은 사회 현상, 자연 현상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정규 교육 과정에서 배우는 모든 이론들이 사실 사회현상과 자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고정된 틀이고 연역과 귀납을 통해 확립된 인식체계이다.
바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토머스 쿤이 이야기 한 ‘패러다임(Paradigm)’이다

문제는 적용에 있다.
기존의 고정된 사고방식이나 고정된 인식을 주변 상황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시각에서 적용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창의적인 활동이 된다.
중소기업이 오랜 시간을 들여 구축한 핵심 역량(Core Competency) 또는 핵심 기술(Core Technology)에 집요하게 매달리면서 역발상을 포함한 새로운 발상과 응용으로 끈질기게 다양한 상품화를 시도하는 과정이 바로 이런 창의적인 활동에 해당된다.

로마의 핵심역량(Core Competency)인 중무장 보병의 전투력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전투 환경 자체를 육전 환경으로 바꾼 것은 과거의 장점을 고집하면서 오히려 그 대상인 환경을 바꾼 창의적인 경우이다.
해전 전문이 아닌 육군 담당 집정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었으리라


넷향기(http://nethyangki.net/)님으로 부터 받은 글입니다.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박재희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서 가장 큰 고민은 명분과 이익사이의 갈등일 겁니다. 명분을 따르자니 이익이 없고, 이익을 추구하자니 명분이 달리고, 정말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으실 겁니다.

명분과 이익,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예로부터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텍스트로 유명한 <대학>에는 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物有本末 事有終始) 어떤 것을 먼저 할지 뒤에 할지 안다면 진정 도에 가까울 것이다.(知所先後則近道矣)’ 사실 제가 대학을 처음 읽었을 때 이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머리로만 해석이 되었지 가슴으로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더군요.

사람은 왜 생각하고 경험한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전은 세상을 살아 본 사람들의 안목으로 봐야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이든 근본과 말단, 처음과 끝이 있다. 따라서 리더는 선후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사결정에 중요한 기준이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본말(本末)과 시종(始終), 그리고 선후(先後)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진행할 때 선후를 따집니다.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말단인지, 어떤 것을 먼저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지를 정확히 가릴 수 있다면 이치를 알고 순리를 아시는 분일 겁니다. 문제는 무엇이 선후고, 본말이고, 시종인지 판단하는 것인데요.

맹자와 순자는 선후를 의(義)와 리(利)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의(義)는 명분이고 리(利)는 이익입니다. 명분과 이익 이 두 가지 개념은 동양철학에서 보면 대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서의 문제일 뿐입니다. 명분만 추구하고 이익을 도외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먼저 추구할 것인가? 에 대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전국시대 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명분을 추구하고 이익을 뒤로하면 영광을 얻을 것이다. 선의이후리자영先義而後利者榮 반대로 먼저 이익을 추고 명분을 나중에 한다면 반드시 욕을 먹을 것이다. 선리이후의자요욕先利而後義者辱 선의후리(先義後利)와 선리후의(先利後義) 이 두 가지 상반된 순서의 결과는 어마어마합니다.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은 참담한 결과를 얻을 것이고 명분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은 영광을 얻을 것이란 순자의 이 이야기는 명분과 이익은 선후의 문제이며 선후와 본말을 정확히 알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간단한 이야기지만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오로지 돈만 벌겠다고, 높은 자리만 올라가겠다고 선후를 바꾸고 본말이 전도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 당장은 원하는 것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긴 인생의 항로에서 보면 결코 아름다운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아이디어를 창출함에 원칙과 명분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라면 성공과 아울러 사회적인 존경이란 진정한 영광이 담겨 있을 겁니다.

이순신 장군은 백성의 안위와 조국의 운명을 先으로 하였고 자신의 영달과 성공을 後로 하였기에 성웅으로 존경 받을 수 있었던 아닐까요? <대학>에서는 이 본말론과 선후론을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기본란이말치자부의其本亂而末治者否矣라! 그 근본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그 말단이 제대로 다스려지는 경우는 없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개인 성공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후가 바뀌고 본말이 전도된다면 그 이익과 성공은 결코 탄탄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명분 없는 영원한 이익은 없습니다. 근본이 안 되어 있는데 말단이 잘될 일이 없습니다.

선후를 알고 본말을 알아서 차근차근 순서대로 일을 풀어 가신다면 결국 명분과 이익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 참으로 쉽지 않은 화두입니다.

박재희였습니다.


From 넷향기(http://nethyangki.net/)


분노를 옮기지 마라!

분노를 옮기지 마라!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나는 평생 새로운 것을 배우기 좋아한다. 나는 아무리 화가 나도 주변 사람에게 그 화를 풀지 않는다. 나는 한번 저질렀던 잘못을 두 번 세 번 반복하지는 않는다. 모두 정말 모두 쉽지 않은 덕목들일 겁니다. 우리는 과연 이 중 몇 가지나 가능할까요?

공자의 제자 중에 안회(顔回)라는 사람이 바로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공자가 그의 제자들 중에서 누구보다 아꼈던 수제자 안회. 젊은 나이에 요절한 불운의 사나이기도 한 안회는 맹자와 함께 유교의 인물 중에서 공자 다음으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그가 머리가 갑자기 하얗게 새어가며 원인도 모르고 죽었을 때 공자는 “천상여(天喪予)! 천상여(天喪予)!”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면서 제자의 죽음에 통곡하였습니다. 공자가 73세의 인생을 살면서 먼저 세상을 떠나보낸 제자가 한 둘이 아닐진대 그토록 애통하게 제자의 죽음에 슬퍼한 적은 없었습니다.

너무 슬피 우는 공자에게 어느 제자가 너무 애통해 한다고 하자, 공자는 ‘이 사람을 위해 울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우냐’며 통곡하였던 이야기는 스승의 제자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가난한 삶을 살다간 안회였지만 그의 삶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대단합니다. ‘현명하다! 회야(賢哉라 回也여)! 한 대죽그릇의 거친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먹으며 누추한 빈민가에서 사는 것을(一簞食, 一瓢飮, 在陋巷을)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는데(人不堪其憂어늘) 너는 그 가난 때문에 너의 인생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回也不改其樂이라!) 현명하다! 안회야(賢哉라, 回也여)!’

일명 ‘거친 밥에 물 말아 먹고 사는 궁핍함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는다.’는 ‘단사표음(簞食瓢飮)’의 고사도 안회에 대한 공자의 평가에서 유래된 이야기 입니다. 이런 안회에 대한 평가 중에 가장 백미가. 공자가 살던 노(魯)나라 임금이었던 애공(哀公)의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입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안회야 말로 자신의 수제자임을 공인합니다.

첫째 안회는 배우기를 좋아한 제자다. 좋아할 호자, 배울 학자. 호학(好學)이라! 배움은 공자의 영원한 삶의 주제였습니다. 공자는 스스로 배우는 자라고 칭하였고 그 배움의 결과를 전하는 선생이야 말로 그의 평생의 업이자 사명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의 방법에 가장 근접한 제자. 바로 안회였던 것이죠. 죽고 나서 가장 갖고 싶은 칭호는 학생입니다. 평생 배우다 간사람, 이렇게 기억되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인생이 아닐까요?

둘째 안회는 자신의 분노를 남에게 옮기지 않았다. 아니 불자, 옮길 천자, 성낼 노자, 불천노(不遷怒)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분노를 어디든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안회는 자신의 분노를 속으로 삭이며 멈출 줄 알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나의 분노를 주변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처럼 비겁한 일은 없습니다. 자신의 분노를 사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완성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닐까요?

셋째 안회는 한 번 저지른 과오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았다. 불이과(不二過)라!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지만 두 번 반복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실수로 그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안연이었습니다. 잘못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잘못을 두 번 저지르는 것인 문제라고 합니다. 잘못을 떳떳하게 인정하고 과감하게 고치는 사람이 진정 성공하는 자 일겁니다.

여러분! 세상에 어느 누가 완성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한 때 잘 배운 사람보다는 평생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 시대에 진정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일 겁니다. 세상에 누가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분노를 참는 사람보다는 주변에 그 분노를 옮기지 않는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일 겁니다. 세상에 누가 잘못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잘못을 아예 안 하는 사람보다는 한 번 한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 더욱 현명한 사람일 겁니다.

평생 배우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화내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며 고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박재희였습니다.


넷향기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몰입의 즐거움

몰입의 즐거움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선비’라는 계층만큼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한 계층은 없을 겁니다. 일본 역사에서 사무라이 라는 계층에 비견할 만한 이 조선의 ‘선비’라는 계층은 오늘날 우리가 다시한번 재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합니다.

일명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 계층은 독특한 문화와 활동 역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야에서는 지역사회의 여론 주도 계층이었고, 다양한 지역의 분쟁을 조정하는 해결자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왕권의 가장 강력한 견제자로서 정책의 부당함을 목숨을 걸고 저지하였고, 나라가 위급할 땐 붓을 꺾고 칼을 들었던 구국의 투사이기도 하였습니다. 선비는 때론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허위의 양반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세상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지식 속에서만 안주하는 고집 센 사람의 표본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죠.

그런데 이 조선 왕조 5백 년을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선비’ 계층의 가장 긍정적인 특징 하나를 들라면 바로 ‘몰입’이 가능한 계층이었다는 것일 겁니다. 선비들은 우선 독서에 몰입하는 훈련을 어려서부터 받았습니다. 어떤 책이든 잡으면 완전히 독파할 때 까지 끝없이 반복해서 그 뜻을 추적해 나가는 몰입의 방법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어렸을 때 몰입의 훈련은 다양한 방면에서 발휘되기도 하였죠. 어떤 선비들은 섬으로 유배를 가서 해양생물에 몰입하여 바다 생물에 관한 백과전서를 남기기도 하였고, 어떤 선비는 의학에 몰입하여 한국인의 풍토와 인물에 맞는 의학서를 저술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것이든 그들의 관심영역에 들어오면 무서울 정도의 열정으로 몰입하여 그 이치를 깨달았던 사람들입니다. ‘선비의 몰입’ 오늘날 우리가 계승해야 할 선비정신 중에 하나일 겁니다.

<중용>이란 책에는 선비의 몰입과 관련된 5가지 몰입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박학(博學)! 배우려면 널리 배워라! 둘째 심문(審問)! 물으려면 깊이 파고들어 물어라! 셋째 신사(愼思)! 생각하려면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생각하라! 넷째 명변明辨)! 판단하려면 명확하게 판단하라! 다섯째 독행(篤行)! 행동하려면 독실하게 실천하라! 일명 중용에서 나오는 5가지 몰입에 관한 이론입니다. 중용에서는 5가지 항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군자는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운다고 마음먹었으면 완전히 통달하지 않고는 그만 두지 않는다. 묻지 않을지언정 한번 물으면 정확히 알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한번 생각하면 명확한 해답을 얻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는다. 판단하지 않을지언정 한번 판단하면 제대로 밝히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을지언정 한번 행동하면 확실히 실천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는다.’

모두가 어떤 것이든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몰입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비들은 이 5가지 몰입 이론에 근거하여 어떤 분야든 끝까지 파고들어 그 원리를 깨치고 바닥을 보는 것을 선비 됨의 자세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 분야에 대한 노력과 열정을 중용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한 번에 그 일을 해내면 나는 백 번에 해낼 것이며(人一能之면 己百之오), 다른 사람이 열 번을 하여 그 일을 해 내면 나는 천 번에 해 낼 것이다.(人十能之면 己千之라). 군자의 학문은 안하면 안했지(君子之學 不爲則已) 한번 하면 반드시 끝장을 본다.(爲則必要其成)

저는 중용의 이 구절을 읽을 때 마다 어떤 전율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넓은 배움과 깊은 물음. 신중한 생각과 명확한 판단, 그리고 과감한 행동. 범상치 않은 몰입의 방법들입니다. 넓게 배워라! 博學, 그리하여 배움의 지평을 확장하라! 깊이 물어라! 審問, 그리하여 깊은 답을 찾아내라! 신중하게 생각하라! 愼思, 그리하여 후회가 없게 하라! 명확하게 판단하라! 明辯, 그리하여 한 치의 착오도 없게 하라! 독실하게 행하라! 篤行! 그리하여 완벽하게 일을 수행하라! 조선의 진정한 선비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감사합니다.


From 넷향기(http://www.nethyangki.net/)


논어의 대인관계 6계명

논어의 대인관계 6계명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오늘은 논어에서 말하는 인간관계 원칙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수 많은 동양 고전 중에서 대인관계와 관련된 최고의 책을 꼽으라 하면 두 말 할 나위 없이 논어를 꼽을 것입니다.
논어에는 부모와 자식, 군주와 신하, 국가와 백성, 친구와 친구,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등 모든 인간관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논어에서 말하는 인간관계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간단히 몇 가지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공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己所不欲을 勿施於人하라!
己所不欲,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勿施於人,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입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인간관계의 시작이란 뜻이겠지요.

내가 쓰고 싶지 않은 물건 고객도 쓰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제품을 만들든 고객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하고 만든다면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한 번만 고민해 보면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첫걸음일겁니다.

둘째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마라! 그보다 먼저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라!
不患人之不己知요 患不知人也)라!
좋은 보석은 누구나 알아보기 마련입니다. 囊中之錐라고 하나요!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은 반드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정말 알아 줄만한 실력과 인격을 먼저 갖추면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잘못을 알았으면 고치는데 주저하지 마라!(過則勿憚改)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잘못이다(過而不改, 是謂過矣).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쉬쉬하며 문제를 덮으려고 하다가는 결국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잘못을 하는 것 보다 고치지 않는 것이 정말 잘못이라는 지적입니다.

넷째 자신과 다른 것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에게 해가 될 뿐이다.(攻乎異端 斯害也已) 나와 다른 것에 대하여 무조건 비판하고 깎아내린다면 결국 본인에게 해만 될 뿐이라는 경고입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과 함께 할 때 관계는 소통됩니다. 오로지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다섯째 군자는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서 찾는다(君子는 求諸己라).
그러나 소인은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린다(小人은 求諸人이라).

군자는 공자의 영원한 이상형입니다. 소인은 물론 그 반대이고요.
떳떳이 모든 책임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내 탓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군자란 뜻입니다.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는 것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섯째 군자는 모든 사람과 조화를 이루나 같음을 강요하지는 않는다(君子和而不同이라!
반면 소인은 같음만을 원하고 조화를 이룰 줄 모른다(小人同而不和).

일명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화(和)는 조화입니다.
탄력적인 눈높이를 가지고 주변사람과 역동적인 인간관계를 갖는 것을 화(和)라고 합니다.
반면 동(同)은 패거리입니다. 고정관념과 이익에 눈이 가려 패거리를 만들어 싸우는 사람을 동(同)이라 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포용의 정신이 인간관계의 완성입니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논어의 인간관계 이론을 생각해 보았는데요. 논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져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에야 知松栢之後凋也라)
좋은 사람, 좋은 기업은 어려운 상황이 되어서도 빛이 납니다.
어렵다고 모두 변칙으로 조직을 운영할 때, 원칙을 소중히 여기고 가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은 어려울 때 더욱 빛이 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넷향기(http://nethyangki.net/)'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버려야 산다. 차시환혼(借屍還魂)

버려야 산다. 차시환혼(借屍還魂)
박재희

중국의 병법 중에 차시환혼(借屍還魂)이란 전술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빌릴 차(借)에 죽은 사람의 시신을 뜻하는 시(屍), 차시(借屍)는 죽은 다른 사람의 육신을 빌린다는 뜻이고, 돌아올 환에 영혼 혼, 환혼(還魂)은 나의 죽었던 혼을 되돌린다 뭐 이런 뜻인데요.. 그러니까 내 육신이 없어지고 영혼만 남았을 때 다른 죽은 사람의 시체라도 빌려서 다시 환생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전술입니다.

이 병법은 자신의 잃어버린 영혼을 다른 사람의 육신을 빌려 환생하였다는 어느 도사의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옛날 이현(李玄)이라는 도사가 있었는데 워낙 도력이 높아 누구나 보면 신선 같은 풍모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우아한 육신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이 도사는 인간계와 선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는데, 어느 날 잠시 육체를 떠나 신선이 있는 하늘로 영혼이 올라갔는데, 7일 만에 다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육신이 다른 사람들 손에 불태워 없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은 그 도사를 죽었다고 생각해서 그랬겠죠. 자신의 우아한 육체를 잃어버리고 고민하던 그 도사는 마침 길거리에 죽어있는 거지의 죽은 시신을 발견하고 그 거지의 몸속으로 들어가 인간으로 다시 환생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자신이 들어간 새로운 시신이 별 볼일 없는 거지의 몸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그는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인데요. 만약에 지상으로 돌아온 이현(李玄)이 자신의 우아한 옛날 육체만 고집하고 새로운 육신을 거부하였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는 영원히 인간으로 살아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영혼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현실을 거부하고 지나간 시절만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으로 자주 인용되는 고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과연 이런 상황이라면 옛날의 우아한 모든 것을 버리고 더럽고 천한 거지의 몸을 선택하실 수 있겠습니까?

회사가 부도나거나 조직이 와해되어 자리를 잃게 될 때 반응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주저앉아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만 흘리는 유형이고, 둘째는 툴툴 털고 다른 조직, 다른 직책으로 바꿔 타고 새롭게 자신의 영혼을 되살리는 유형이지요.

비록 별 볼일 없는 조직의 하찮은 직책이라도 그 계기를 통해 새롭게 재기하는 전략을 세우실 수 있는 분이라면 남의 시신을 빌려 자신의 영혼을 되살리는 차시환혼(借屍還魂)의 병법을 꿰뚫은 분이실 겁니다.

비록 이전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남들에게 보이기 싫은 내 모습이라도 내 영혼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주저 없이 바꿔 타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기업 임원을 지내다가 중소기업의 하찮은 자리로 옮겨 결국 더 큰 승리를 얻었다는 분이나, 3도 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있다가 백의종군하는 하찮은 자리라도 마다않고 기꺼이 운명을 갈아탈 줄 아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 속에서 상황을 직시하고 유연하게 자신의 모습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세상엔 고정된 모습이란 없다. 다가 온 모습을 유연하게 받아들여 내 모습을 바꿀 줄 아는 자만이 승리를 유지할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이런 유연한 사고를 강조하면 물을 닮으라고 말합니다.

수무상형(水無常形)이라! 물은 고정된 모습이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장군은 물과 같아야 한답니다. 자신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부술 줄 아는 장군만이 마지막 승자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육체(屍)냐가 아니라 어떤 정신(魂)을 가지고 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처세나 조직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차시환혼(借屍還魂)의 전술은 결국 영원한 생존을 위한 전술입니다. 생존을 위하여 새로운 육체를 찾아 끊임없이 떠도는 영혼(魂)의 계속되는 행진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의 행동방식이며 삶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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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리더의 모습. 대기만성(大器晩成)

진정한 리더의 모습. 대기만성(大器晩成)
박재희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있습니다.

글자 뜻대로 해석하면 대기(大器) - 큰 그릇은, 만성(晩成) - 오랜 시간이 걸려야 완성된다. 조직에서 유능한 인재 하나를 키우고 만드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뜻으로 우리 주변에서 자주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이 대기만성의 철학은 원래 그런 뜻으로만 쓰인 것은 아닙니다. 노자의 도덕경. 당시 군주들에게 리더십을 강의한 책인데요. 대기만성할 때 대기(大器)의 큰 그릇은 그 당시의 리더들, 즉 군주를 의미하고 만성(晩成)의 만(晩)은 늦을 만자가 아니라 날일(日) 자를 뺀, 면할 면(免) 부정의 뜻으로 쓰였던 글자입니다. 대기만성(大器晩成), 그러니까 정말 큰 지도자는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즉 큰 그릇은 완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도 세상에서 제일 큰 그릇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릇일 겁니다.

이미 제일 큰 그릇이 완성되었다고 확정할 때 그 그릇보다 더 큰 크기의 그릇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완성된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단한 자기 계발과 노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무한의 모습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정말 큰 그릇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기만성의 본래 뜻입니다.

옛날에 한 번 만들어진 모습으로 평생을 변화 없이 산다는 것, 물론 아름답고 편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세상으로 보고, 새로운 마인드로 사람을 대하는 모습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스펀지처럼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은 무한한 존경심을 갖게 되고 아울러 자기반성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대기만성. ‘큰 그릇은 완성이 없다.’ 리더에게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내 크기를 키워나가라고 혁신하라는 충고의 말입니다.

‘대학(大學)’이란 고전에도 탕(湯) 임금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대기만성의 혁신철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진실로 오늘 하루가 새로웠다면(苟日新이어든)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며(日日新하고) 또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又日新하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신(日新)의 철학입니다.

탕(湯) 임금은 중국 고대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은(殷)나라를 세운 군주였습니다.

혁명의 주체이자 장군이었던 그는 매일 저녁 목욕하는 목욕통에 이 일신(日新)이라는 글을 새겨 넣고 몸을 씻을 때마다 자신에게 날마다 새로워지라고 주문을 외웠던 것입니다.

‘어제의 모습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내가 날마다 새로워 져야 내 주변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 일명 ‘대학’에서 백성들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신민(新民)’의 개념입니다. 지도자가 매일같이 새로워야 백성들도 새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지요. 제3공화국에서 사용하였던 ‘유신(維新)’이란 개념이나 ‘신민당(新民黨)’이란 정당 이름의 어원 모두 여기서 나온 개념입니다.

대기만성(大器晩成)과 일신(日新)은 원래 같은 의미입니다. 정말 큰 그릇이 되려면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날마다 새로워 져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도덕경에서는 대기만성과 함께 리더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는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大音希聲, 대음희성). 세상에서 가장 큰 형상은 형체가 보이지 않습니다(大象無形, 대상무형).’

위대한 지도자는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고, 완성도 없다는 이 구절들은 지도자의 모습은 영원한 변화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발상과 새로운 지식으로 무한의 모습을 만들어가라! 완성된 모습, 정해진 소리, 보이는 형체에 머물지 마라! 큰 그릇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당신이 날마다 새롭게 변해야 당신의 주변 사람들이 새롭게 변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수천 년 동안 동양 역사를 통해 흐르는 날마다 혁신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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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고궁 (君子固窮)

군자고궁(君子固窮)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입니다.

조선시대 서화가이자 실학자였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문학가였다.

특히 서화에 능했던 김정희 선생은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대성시켰으며 예서 행서의 새로운 전형을 남긴 분으로도 유명하다. 제주도 유배를 포함하여 다양한 인생 역정을 겪었던 추사 김정희 선생, 그가 1844년 제주도 유배시절 그의 제자 이상적에게 준 그림 ‘세한도(歲寒圖)’는 보물 180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눈 내린 추운 겨울, 엄동설한에도 시들지 않고 서있는 소나무(松)와 잣나무(柏) 그림은 우리에게 어려운 시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상이 서려 있다.

세한에는 추사가 직접 쓴 글이 있는데 그 글귀 속에는 논어의 한 구절이 들어가 있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세월이 추워진 연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

세탁연후지군자지불변(世濁然後知君子之不變)

세상이 추워지고 온통 눈으로 뒤 덮여 추위와 바람만이 가득할 때, 그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푸름을 잊지 않고 서 있는 소나무의 기상을 그린 세한도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사람은 위기가 닥쳐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평소에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정감 많은 사람이 위기에 닥치면 전전긍긍 어찌할 줄 모르고, 의리와 신념을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 어떤 나무가 정말 강한 나무인지 알듯이 어렵고 힘든 위기상황은 그 사람의 정신력과 위기대응지수를 알게 해 주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논어(論語)에 보면 군자(君子)는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사람이라 하고(君子固窮), 소인(小人)은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고 넘쳐버리는 사람(小人窮濫)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와 세상을 주유(周遊)할 때 진(陳)나라에서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이하였다. 제자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대부분 병이 들었고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다. 이런 궁한 상황에서 공자의 다혈질 제자 자로(子路)는 공자를 만나 이렇게 따졌다. “선생님! 군자도 이렇게 궁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까?”

자로의 이 물음 속에는 공자를 믿고 따르는 아무 죄 없는 제자들이 왜 이런 힘든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를 공자에게 따져 묻는 것이었다. 공자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였다.

“군자는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사람이다(君子固窮). 그러나 소인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곧 원칙을 버리고 넘치게 되지(小人窮斯濫).”

공자의 이 말 속에는 어려움 속에 대처하는 두 가지 인간의 전형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논리가 있다.

어려움(窮), 그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의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궁(窮)한 상황에서 더욱 단단해(固) 질 것인가? 아니면 넘쳐(濫) 흘러 이성을 잃고 우왕좌왕 할 것인가?

성공한 사람들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버텨낸 고궁(固窮)의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역경이 사람을 더욱 강하게 한다.

주변의 성공한 분들은 추위 속에서 견뎌 낸 소나무 처럼 잣나무 처럼 역경 속에서 절대로 굴하지 않고 묵묵히 위기를 겪어 내신 분들이다!!

군자고궁!!!

감사합니다. 박재희 였습니다.

http://www.nethyangki.net/CDN/View.aspx?num=8526


넷향기(postmaster@nethyangki.net)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君子固窮(군자고궁) |

권토중래(捲土重來)

권토중래(捲土重來)
박재희

안녕하십니까? 박재희 입니다.

‘흙먼지 일으키며 살아서 다시 돌아오리라!’ 권토중래(捲土重來)!

어렵고 힘들 때 마다 새로운 재기를 꿈꾸며 외치는 리더들의 생존 화두다. 지금은 비록 패하였지만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기세(氣勢)로 지나간 패배를 반드시 설욕하리라는 각오가 담겨있는 이 구절은 초(楚)나라 항우(項羽)와 한(漢)나라 유방(劉邦)과의 전쟁에 대하여 두목(杜牧)이라는 당(唐)나라 시인이 읊은 시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초패왕으로 유명한 초나라 항우는 한나라 유방과 전쟁에서 결국 패하고 말았다. 병력과 물자 등 모든 면에서 우세했던 항우가 진 이유는 다양하다. 오로지 자신의 우세한 전력만 믿고 상대방을 과소평가 한 점, 승리에 대한 대책도 없이 무리하게 군대를 운영한 점, 병사들과 승리의 성과와 이익을 공유하지 못하고 감정과 분노에 무리한 결정과 판단을 한 것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특히 해하성(亥下城) 전투에서 사면초가에 빠져 사랑하는 여인 우미인과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인생을 마감한 항우의 가장 큰 패착은 새로운 기회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는 것이다. 잠깐의 분노와 수치를 참고 다시 병사들을 모아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권토중래(捲土重來)의 판단을 하였더라면 얼마든지 재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자기에게 다가온 위기에 힘없이 무너져 버린 항우는 결국 절망이라는 재앙 때문에 역사의 패배자로 남게 되었다. 사실 항우(項羽)를 밀어주는 초(楚)나라는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가 많아서 항우가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재기의 칼을 갈고 때를 기다렸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항우는 자신은 역사에 위대하고 폼 나는 장군으로 기억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를 믿고 투자했던 초나라 원로들은 완전히 파산하였고, 그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던 병사들은 패배한 군대의 병사들로 객귀(客鬼)가 되어 전장에서 쓰러져 갔던 것이다.

천 년이 지난 어느 날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항우가 마지막 숨을 거둔 오강을 지나면서 '제오강정시(題烏江亭詩)'라는 시(詩)를 지어 재기의 아쉬움을 노래하고 있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에서 반드시 기약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다(勝敗不可兵家期)!
지금의 실패에 부끄러움을 가슴에 새기고 치욕을 참는 것이 진정 남아로다(包羞忍恥是南兒)!
네 고향 강동의 젊은이들 중에는 준걸이 많은데(江東子弟多才俊),
흙먼지를 휘날리면서 다시 재기하여 올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알지 못 하였는가(捲土重來未可知)!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말이 나온 두목(杜牧)의 시(詩)다.

잠시 치욕과 분노를 참고 훗날을 기약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권토중래의 철학은 포기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희망은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오늘날 성공한 기업들 중에는 권토중래의 철학으로 위기를 이겨내고 재기에 성공한 기업이 많다. 신(神)이 아닐진대 어찌 이기는 게임만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힘들고 어려울 때 포기하지 않고 답을 찾아내는 긍정의 힘이다.

지금의 치욕과 분노는 잠시다. 미래의 성공과 생존이 중요하기에 피눈물을 흘리며 잠시 뒤로 물러설 수가 있는 것이다. ‘장수가 전쟁터에 나가 공격을 명령함에 명예를 구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또한 후퇴를 명령함에 죄를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공격과 후퇴의 모든 판단 기준은 오로지 국가의 생존과 병사들의 안전에 있는 것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진퇴에 대한 장군의 철학이다.

항우(項羽)는 치욕을 참고 잠시 몸을 피했어야 했다.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돌아오겠다는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각오로 자신을 믿고 목숨을 건 병사들과 자신에게 인생을 건 고향의 원로들에게 승리로 보답했어야 옳았다. 절망을 용기 있게 끊어버리는 순간 눈앞에는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는 것을 항우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와서 반드시 재기하리라! 권토중래!!

진정한 승리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용기 있게 재기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재희 였습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捲土重來(권토중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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