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과 내리막
오르막과 내리막
"아버지, 실은 저 직장에서 쫓겨났어요."
아버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소탈하게 웃으시며 그를 위로했다.
"살다 보면 별일 다 겪는데 걱정 말거라.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고, 또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는 것 아니니. 상처 입은 나무가 단단한 법이다. 세상이 네게만 모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다."
- 임붕영의《아버지의 웃음》중에서 -
결코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닙니다. 언제든 있을 내 이야기, 우리집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절망의 자리에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다시 일어서면 또 다른 갈 길이 보입니다. 인생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입니다. 먼저된 자 나중되고, 나중된 자 먼저 됩니다.
좋은 글 입니다.
[유머] 들어서 기분 나쁜 칭찬 - 칭찬도 가려서 합시다.
1."당신은 살아있는 부처님입니다."
-선행을 베푸시는 목사님에게-
2."할머니,꼭 백살까지 사셔야돼요!"
-올해 연세가 99세인 할머니께-
3."당신은 정직한 분 같습니다"
-직구밖에 못던져 좌절하고 있는 투수에게-
4."참석해 주셔서 자리가 빛났습니다"
-머리가 반짝이인 대머리 아저씨에게-
5."어머나, 머릿결이 왜 이렇게 곱지? 마치 만든 머리 같아요."
-가발을 쓴 대머리에게-
6."남편께서 무병 장수하시길 빕니다"
-매일 구타당하는 아내에게-
7."당신의 화끈함이 맘에 듭니다!"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
8."댁의 아들이 가업을 잇겠다는 말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도둑에게-
미소는 당신이 가진 가장 값진 재산입니다
받은 글입니다.
-선행을 베푸시는 목사님에게-
2."할머니,꼭 백살까지 사셔야돼요!"
-올해 연세가 99세인 할머니께-
3."당신은 정직한 분 같습니다"
-직구밖에 못던져 좌절하고 있는 투수에게-
4."참석해 주셔서 자리가 빛났습니다"
-머리가 반짝이인 대머리 아저씨에게-
5."어머나, 머릿결이 왜 이렇게 곱지? 마치 만든 머리 같아요."
-가발을 쓴 대머리에게-
6."남편께서 무병 장수하시길 빕니다"
-매일 구타당하는 아내에게-
7."당신의 화끈함이 맘에 듭니다!"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
8."댁의 아들이 가업을 잇겠다는 말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도둑에게-
미소는 당신이 가진 가장 값진 재산입니다
받은 글입니다.
오월
오월
성큼성큼 다가선
장미향 가득할 오월에
블루문의 축복으로 큰사랑 엮고
어린 아이들 사랑해주고
어버이 스승님께 감사하고
성인 되고 부부 됨을 축하하고
부처님 오심을 봉축합니다
Blue Moon은 양력으로 한달 안에 음력 보름이 두 번 포함되어 두 번째 보름달이 뜨면 그 두 번째 보름달을 Blue Moon이라 한다.
받은 글입니다.
성큼성큼 다가선
장미향 가득할 오월에
블루문의 축복으로 큰사랑 엮고
어린 아이들 사랑해주고
어버이 스승님께 감사하고
성인 되고 부부 됨을 축하하고
부처님 오심을 봉축합니다
Blue Moon은 양력으로 한달 안에 음력 보름이 두 번 포함되어 두 번째 보름달이 뜨면 그 두 번째 보름달을 Blue Moon이라 한다.
받은 글입니다.
자주 전화하세요
자주 전화하세요
우리는 쉼없이 누군가와 소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 속에 혹시 부모님도 포함되어 있나요?
우리가 소통에 목말라 있듯, 부모님은 자식들과의 소통에 목말라 하십니다.
자주 전화하세요.
할 말이 없으면 가끔은 "오복순 씨!" 하고 어머니 이름을 장난스레 불러보세요.
"나 오복순 아닌데요." 하며 장난을 받아주실지도 모르니까요.
수화기 너머 저편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분명 행복이 묻어 있을 겁니다.
- 고도원의《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해드려야 할 45가지》중에서-
어버이날입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 어렵고도 쉽습니다. 자주 전화하세요. 가능하면 하루에 한 번 전화 드리십시오. 전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곧 올지 모릅니다. 안마도 해드리고 용돈도 좀 드리면 더 좋습니다. 부모님의 기쁨이 나의 행복입니다.
받은 글입니다.
은어야, 사랑이 뭐니?
"은어야, 사랑이 뭐니?"
"섬진강아, 너 왜 흐르지 않는 거니?
너 때문에 우리 물고기들이 숨이 막혀 죽겠어."
은어는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났다.
"넌 정말 사랑이 없구나. 너를 믿은 우리가 바보야."
"은어야, 사랑이 뭐니?"
"네가 흘러가는 것이 사랑이야.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게 바로 사랑이란 말이야."
"그래?"
- 정호승의《항아리》중에서 -
사랑은 거창한 것도, 요란한 것도 아닙니다. 강물이 그렇듯, 그저 잘 흘러가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매사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당신의 모습에서 깊은 사랑과 감동을 느낍니다.
받은 글입니다. 원 출처는 '고도원의 아침편지'인 듯..
손명근 교수 ! 당신을 존경합니다
손명근 교수 ! 당신을 존경합니다
두 자녀에게는 결혼자금등.... 각3억뿐
200억원+ α 는 ‘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기부’
심장수술 최고권위 송명근 건국대 교수
독자개발한 심장 판막제품 으로 5년새 재산 급증…
앞으로 더 늘면 “마음 변할까봐 유언장 공증 공개”
2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서약한 건국대병원 송명근(56) 교수와 심혁순(52) 부부는 5년 전 재산 사회환원을 명시한 유언장 공증을 해놓을 때만 해도 재산이 이렇게 불어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송 교수는 “이 결정을 할 때 고민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고 난들 왜 고민을 안 했겠느냐며 하지만 사회 생활로 번 돈은 사회로 다시 돌려주는 것이 나의 인생 철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아들 1명, 딸 1명)에게 3억씩 전세금 등 결혼비용 주고 얼마가 됐던 재산을 전부 다 환원하겠다고 한 건데 일이 이렇게 커졌다”며 “자식은 물론 앞으로 맞을 사위나 며느리는 빈털터리 집에 들어온다고 보면 된다(웃음)”고 말했다.
줄곧 대학교수로만 일한 그가 이렇게 많은 재산을 갖게 된 것은 직업에 충실한 결과다. 1990년대 초반, 송 교수는 외과 의사로서 기존의 대동맥 판막 수술법에 불만이 많았다. 당시 심장에서 대동맥으로 피가 뿜어져 나가는 길목인 대동맥 판막에 문제가 생기면 판막 전체를 인공 판막으로 갈아 끼우는 것이 정통 수술법이었다. 인공 판막 비용만 400만~500만원이 드는 비싼 수술이다.
송명근 교수는“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서약을 한 이후 아이들이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걸 보고 이 결정을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뭔가 새로운 수술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송 교수는 대동맥 판막 환자의 심장 박동 동영상을 컴퓨터로 수백 차례 분석했다. 이를 통해 판막기능이 잘 작동하지 않는 부위만 단단히 잡아주면 판막 기능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송 교수는 매주 도살장에서 돼지 심장 5~10개를 사와 자신이 개발한 판막기능 보조 장치인 ‘SS-Ring’ 수술법을 연습했다. 지금까지 쓰인 돼지 심장이 1000여 개이다.이를 바탕으로 그는 1997년 심장 판막 장비를 제조 판매하는 사이언스시티사(社)를 세웠다. 제품은 한 세트 가격이 240만원 선으로 기존 인공판막의 절반 수준이다.
그의 제품은 국내외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미국•유럽•일본 등 전 세계에서 특허도 받았다. 이 제품으로 수술하고 싶다는 요청이 미국•일본•이탈리아•브라질•멕시코 등 전 세계에서 폭주했다.
수술과정을 보여달라는 국제 학회 초청 특강 요청도 1년에 8~10회에 이른다. 최근에는 심장 수술로 유명한 미국 뉴욕의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에서수술법을 전수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또 미국 유명 의료기기 회사가 송 교수 회사의 경영권을 5000만 달러(약 475억원)에 인수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다.
캐나다의 한 의료기기 회사는 그의 제품을 몰래 복사해서 팔다가 발각되는 일도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회사설립 초기에 미미하던 실적이 크게 뛰었고, 회사지분 40%를 가진 데다 제품 판매에 따른 로열티를 별도로 받는 송 교수 부부에게 약 200억원 가치의 재산이 돌아오게 된 것이다. 현 시점에서 그의 자택과 부동산 등 40여억원을 합치면 200억원을 훌쩍 넘는 돈이 사회에 환원되는 셈이다.
앞으로도 몇 백억으로 불어날지 알 수 없자 송 교수는 사회환원에 관한 3가지 원칙을 최근 세웠다.
'첫째 심장병 연구에 쓸 것, 둘째 소외된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쓸 것, 셋째 버려진 고아들을 위해 쓸 것’이다. 그는 이런 내용으로 유언장 공증을 다시 받을 예정이다.
그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결심한 데는 2002년 즈음 읽은 유한양행 창업자 고(故) 유일한 박사의 전기가 큰 역할을 했다.
“기업이 번 돈은 사회로 돌려줘야 한다는 유일한 박사의 정신에 크게 감동 받았죠. 의사가 돈을 벌 수는 있지만 그 돈은 사회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고 봐요.”
재산 많은 노인 환자의 심장 수술을 앞둔 상태에서 자식들끼리 재산 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결심을 더욱 굳혔다고 그는 전했다. 아들 준영(28•중앙대의대 의학과 3년)씨와 딸 윤주(26•연세대의대 세브란스병원 인턴)씨도 부모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고 한다.
현재 전 세계 심장 판막 시장은 1조5000여억원. 그의 제품이 5년 내에 세계 시장의 33%를 확보할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그는 “우리 회사를 외국에 팔지는 않을 것”이라며 “한국 브랜드로 승부해서 세계 시장을 석권하면 나중에 사회에 환원되는 돈이 더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때까지 열심히 일해야죠”라고 했다.
송명근 교수는 심장 수술 분야의 ‘신기록 제조기’로 정평이 나있다. 1988년 국내 최초로 뇌사자의 판막을 심장병 환자에게 이식하는 데 성공했고, 1992년에는 심장 이식 수술을, 1997년에는 보조 인공심장 이식 수술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해냈다. 지금까지 8000여건의 심장수술을 했다. 올해 10월 18년 동안 몸담았던 서울아산병원을 접고 건국대병원에 ‘병원장급 스타 의사’ 케이스로 영입됐다.
받은 글입니다.
두 자녀에게는 결혼자금등.... 각3억뿐
200억원+ α 는 ‘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기부’
심장수술 최고권위 송명근 건국대 교수
독자개발한 심장 판막제품 으로 5년새 재산 급증…
앞으로 더 늘면 “마음 변할까봐 유언장 공증 공개”
2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서약한 건국대병원 송명근(56) 교수와 심혁순(52) 부부는 5년 전 재산 사회환원을 명시한 유언장 공증을 해놓을 때만 해도 재산이 이렇게 불어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송 교수는 “이 결정을 할 때 고민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고 난들 왜 고민을 안 했겠느냐며 하지만 사회 생활로 번 돈은 사회로 다시 돌려주는 것이 나의 인생 철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아들 1명, 딸 1명)에게 3억씩 전세금 등 결혼비용 주고 얼마가 됐던 재산을 전부 다 환원하겠다고 한 건데 일이 이렇게 커졌다”며 “자식은 물론 앞으로 맞을 사위나 며느리는 빈털터리 집에 들어온다고 보면 된다(웃음)”고 말했다.
줄곧 대학교수로만 일한 그가 이렇게 많은 재산을 갖게 된 것은 직업에 충실한 결과다. 1990년대 초반, 송 교수는 외과 의사로서 기존의 대동맥 판막 수술법에 불만이 많았다. 당시 심장에서 대동맥으로 피가 뿜어져 나가는 길목인 대동맥 판막에 문제가 생기면 판막 전체를 인공 판막으로 갈아 끼우는 것이 정통 수술법이었다. 인공 판막 비용만 400만~500만원이 드는 비싼 수술이다.
송명근 교수는“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서약을 한 이후 아이들이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걸 보고 이 결정을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뭔가 새로운 수술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송 교수는 대동맥 판막 환자의 심장 박동 동영상을 컴퓨터로 수백 차례 분석했다. 이를 통해 판막기능이 잘 작동하지 않는 부위만 단단히 잡아주면 판막 기능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송 교수는 매주 도살장에서 돼지 심장 5~10개를 사와 자신이 개발한 판막기능 보조 장치인 ‘SS-Ring’ 수술법을 연습했다. 지금까지 쓰인 돼지 심장이 1000여 개이다.이를 바탕으로 그는 1997년 심장 판막 장비를 제조 판매하는 사이언스시티사(社)를 세웠다. 제품은 한 세트 가격이 240만원 선으로 기존 인공판막의 절반 수준이다.
그의 제품은 국내외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미국•유럽•일본 등 전 세계에서 특허도 받았다. 이 제품으로 수술하고 싶다는 요청이 미국•일본•이탈리아•브라질•멕시코 등 전 세계에서 폭주했다.
수술과정을 보여달라는 국제 학회 초청 특강 요청도 1년에 8~10회에 이른다. 최근에는 심장 수술로 유명한 미국 뉴욕의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에서수술법을 전수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또 미국 유명 의료기기 회사가 송 교수 회사의 경영권을 5000만 달러(약 475억원)에 인수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다.
캐나다의 한 의료기기 회사는 그의 제품을 몰래 복사해서 팔다가 발각되는 일도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회사설립 초기에 미미하던 실적이 크게 뛰었고, 회사지분 40%를 가진 데다 제품 판매에 따른 로열티를 별도로 받는 송 교수 부부에게 약 200억원 가치의 재산이 돌아오게 된 것이다. 현 시점에서 그의 자택과 부동산 등 40여억원을 합치면 200억원을 훌쩍 넘는 돈이 사회에 환원되는 셈이다.
앞으로도 몇 백억으로 불어날지 알 수 없자 송 교수는 사회환원에 관한 3가지 원칙을 최근 세웠다.
'첫째 심장병 연구에 쓸 것, 둘째 소외된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쓸 것, 셋째 버려진 고아들을 위해 쓸 것’이다. 그는 이런 내용으로 유언장 공증을 다시 받을 예정이다.
그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결심한 데는 2002년 즈음 읽은 유한양행 창업자 고(故) 유일한 박사의 전기가 큰 역할을 했다.
“기업이 번 돈은 사회로 돌려줘야 한다는 유일한 박사의 정신에 크게 감동 받았죠. 의사가 돈을 벌 수는 있지만 그 돈은 사회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고 봐요.”
재산 많은 노인 환자의 심장 수술을 앞둔 상태에서 자식들끼리 재산 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결심을 더욱 굳혔다고 그는 전했다. 아들 준영(28•중앙대의대 의학과 3년)씨와 딸 윤주(26•연세대의대 세브란스병원 인턴)씨도 부모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고 한다.
현재 전 세계 심장 판막 시장은 1조5000여억원. 그의 제품이 5년 내에 세계 시장의 33%를 확보할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그는 “우리 회사를 외국에 팔지는 않을 것”이라며 “한국 브랜드로 승부해서 세계 시장을 석권하면 나중에 사회에 환원되는 돈이 더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때까지 열심히 일해야죠”라고 했다.
송명근 교수는 심장 수술 분야의 ‘신기록 제조기’로 정평이 나있다. 1988년 국내 최초로 뇌사자의 판막을 심장병 환자에게 이식하는 데 성공했고, 1992년에는 심장 이식 수술을, 1997년에는 보조 인공심장 이식 수술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해냈다. 지금까지 8000여건의 심장수술을 했다. 올해 10월 18년 동안 몸담았던 서울아산병원을 접고 건국대병원에 ‘병원장급 스타 의사’ 케이스로 영입됐다.
받은 글입니다.
나를 열어두는 일
나를 열어두는 일
"일정한 테두리 안에 자신을 가둔 채 계획을 세우지 말고, 상황에 맞게끔 융통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저는 오랜 세월 동안 피아니스트를 꿈꾸웠어요. 그 꿈은 제가 원하는 전부였으니까요. 그러나 그 꿈이 깨어진 다음,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 안토니아 펠릭스의 <콘돌리자 라이스> 중에서 -
받은 글입니다.
Location:
United States
행복은 가꾸어가는 마음의 나무입니다
행복은 가꾸어가는 마음의 나무입니다
나무가 자라기위해서
매일 물과 햇빛이 필요하듯이
행복이 자라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진것이 없어 보이는건
가진게 없는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누스는 사는게 힘이 들때면
내 건강함에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웃음을 행복으로 보고
아무일도 없던 늘 그런 일상에도 감사합니다.
때론 뉴스에 나오는 일가족 교통사고에도
내 가슴을 쓸어 내리며 행복을 훔쳐보곤 합니다.
행복을 저금하면 이자가 붙습니다.
삶에 희망이 불어나는거죠.
지금 어려운건 훗날 커다란 행복의
그늘을 만들어 줄것임을 믿습니다.
사람과 부딪기며 살아가는건
두려움이 아니라 행복의 자잘한 열매입니다.
썩은 열매는 스스로 떨어지고
탐스런 열매만이 살찌우게 됩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마음의 밑바닥에서
시들어가는 행복을 꺼내고 키우셔요.
할 수 있는것을 하지 않으려는것
그것은 죄입니다.
누군가 나를 안타까운 맘으로
지켜보고 있다면 보여주셔요.
그게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야만 합니다.
내 존재의 가벼움은 처음부터 없는거죠..
많은 사람들이 부유하기 위해서만
사는게 아니라는걸 알고 있지요
사는 모습이 다 다르듯
보는 눈도 달라져야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가지의 눈은 하나만 보게된다는것
가진것은 언제든 잃을 수 있지만
내 행복은 지킬 수도 느낄 수 있습니다.
받은 글입니다.
나무가 자라기위해서
매일 물과 햇빛이 필요하듯이
행복이 자라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진것이 없어 보이는건
가진게 없는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누스는 사는게 힘이 들때면
내 건강함에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웃음을 행복으로 보고
아무일도 없던 늘 그런 일상에도 감사합니다.
때론 뉴스에 나오는 일가족 교통사고에도
내 가슴을 쓸어 내리며 행복을 훔쳐보곤 합니다.
행복을 저금하면 이자가 붙습니다.
삶에 희망이 불어나는거죠.
지금 어려운건 훗날 커다란 행복의
그늘을 만들어 줄것임을 믿습니다.
사람과 부딪기며 살아가는건
두려움이 아니라 행복의 자잘한 열매입니다.
썩은 열매는 스스로 떨어지고
탐스런 열매만이 살찌우게 됩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마음의 밑바닥에서
시들어가는 행복을 꺼내고 키우셔요.
할 수 있는것을 하지 않으려는것
그것은 죄입니다.
누군가 나를 안타까운 맘으로
지켜보고 있다면 보여주셔요.
그게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야만 합니다.
내 존재의 가벼움은 처음부터 없는거죠..
많은 사람들이 부유하기 위해서만
사는게 아니라는걸 알고 있지요
사는 모습이 다 다르듯
보는 눈도 달라져야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가지의 눈은 하나만 보게된다는것
가진것은 언제든 잃을 수 있지만
내 행복은 지킬 수도 느낄 수 있습니다.
받은 글입니다.
행복은 별난 곳에 없습니다......
*♡♣ 행복은 별난 곳에 없습니다 ♣♡*
흔히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로 알려진 니콜라스 헤르만(Nicholas Herman)은, 1611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십대 때 ‘30년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일을 전전하다 55세 때,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려고, 파리에 있는 카르멜 수도원에 평신도 수도사로 들어가, 부엌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도사들의 식사를 해주면서 부엌을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식사를 수도사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면서 항상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이 귀한 천사들을 섬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그에게 비천한 부엌일은 가장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하찮은 일도 사명감을 가지면 소중한 일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수도사들을 섬기면서 행복은 갈수록 커졌습니다. 그는 작은 일도 큰 일로 생각했고, 접시 하나 닦는 것을 수많은 군중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렇게 20년을 변함없이 살자, 수도사들은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나중에 수도원에서 원장을 뽑을 때, 원장 후보조차 될 수 없었던 평신도 수도사인 그가 원장에 뽑혔습니다.
그에게 인간적인 행복의 조건은 없었습니다. 그는 교육도 못 받고, 절름발이로 가정도 이루지 못했지만,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인 힘든 부엌일을 하면서도 항상 기쁜 얼굴로 “나는 참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국왕 루이 12세가 수도원을 방문해 그에게 행복의 비결을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섬기는 일입니다.”
행복은 별난 곳에 없습니다. 행복은 사랑과 섬김에 있습니다. 환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합니다. 참된 사랑이 참된 사람을 만듭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 생애 최대 발견은, 초라한 오두막도 최고 궁전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메마른 환경은 아무 문제될 것도 없고,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그는 수도원에 가게 된 이유에 대해 말했습니다.
“나는 죄와 허물과 잘못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으로 들어가, 내 모든 잘못에 대한 벌을 받고, 인생의 즐거움을 희생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내 결심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희생으로 얻은 것은 만족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희생하면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큰 희생은 큰 인생을 만듭니다. 절대 사랑은 절대 행복을 불러옵니다. 행복은 ‘좋은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에서 생깁니다. 진짜 좋은 자리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섬김의 자리'입니다.
‘자극적이고 신비한 것'보다 ‘꾸준하고 평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삶이, 더 귀한 삶입니다. 갑자기 등장하는 신비한 혜성은 없어도 살지만, 매일 떠오르는 평범한 태양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그처럼 평범한 것에 행복의 조건이 다 숨어 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남을 행복하게 할 때 찾아옵니다.
- 작자 미상 -
받은 글입니다.
흔히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로 알려진 니콜라스 헤르만(Nicholas Herman)은, 1611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십대 때 ‘30년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일을 전전하다 55세 때,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려고, 파리에 있는 카르멜 수도원에 평신도 수도사로 들어가, 부엌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도사들의 식사를 해주면서 부엌을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식사를 수도사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면서 항상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이 귀한 천사들을 섬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그에게 비천한 부엌일은 가장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하찮은 일도 사명감을 가지면 소중한 일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수도사들을 섬기면서 행복은 갈수록 커졌습니다. 그는 작은 일도 큰 일로 생각했고, 접시 하나 닦는 것을 수많은 군중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렇게 20년을 변함없이 살자, 수도사들은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나중에 수도원에서 원장을 뽑을 때, 원장 후보조차 될 수 없었던 평신도 수도사인 그가 원장에 뽑혔습니다.
그에게 인간적인 행복의 조건은 없었습니다. 그는 교육도 못 받고, 절름발이로 가정도 이루지 못했지만,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인 힘든 부엌일을 하면서도 항상 기쁜 얼굴로 “나는 참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국왕 루이 12세가 수도원을 방문해 그에게 행복의 비결을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섬기는 일입니다.”
행복은 별난 곳에 없습니다. 행복은 사랑과 섬김에 있습니다. 환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합니다. 참된 사랑이 참된 사람을 만듭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 생애 최대 발견은, 초라한 오두막도 최고 궁전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메마른 환경은 아무 문제될 것도 없고,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그는 수도원에 가게 된 이유에 대해 말했습니다.
“나는 죄와 허물과 잘못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으로 들어가, 내 모든 잘못에 대한 벌을 받고, 인생의 즐거움을 희생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내 결심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희생으로 얻은 것은 만족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희생하면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큰 희생은 큰 인생을 만듭니다. 절대 사랑은 절대 행복을 불러옵니다. 행복은 ‘좋은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에서 생깁니다. 진짜 좋은 자리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섬김의 자리'입니다.
‘자극적이고 신비한 것'보다 ‘꾸준하고 평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삶이, 더 귀한 삶입니다. 갑자기 등장하는 신비한 혜성은 없어도 살지만, 매일 떠오르는 평범한 태양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그처럼 평범한 것에 행복의 조건이 다 숨어 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남을 행복하게 할 때 찾아옵니다.
- 작자 미상 -
받은 글입니다.
잊을 수 없는 일본 택시 기사와 미국의 老교수
잊을 수 없는 일본 택시 기사와 미국의 老교수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을 대하듯이 친절하다면 그는 一流시민이다.
趙甲濟
1975년 4월 어느 날 저녁 일본을 혼자서 여행하던 나는 유명한 해안 휴양지 아다미(熱海)의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근처의 여관에 들었다. 저녁을 먹을 겸 도시 구경에 나섰다. 택시를 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아차"했다. 여관 이름을 기억해두지 않았다. 명함이나 성냥 곽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우선 택시를 잡아탔다.
"아다미에 여관이 몇 개입니까"
"400개입니다"
택시로 그 400개를 뒤지다간 날이 샐 것 같았다. 택시 운전자에게 여관을 잊어버렸다고 했더니 그는 흔쾌히 말했다.
"같이 찾아봅시다. 그런데 역으로 돌아가서 거꾸로 내려옵시다"
택시기사는 역에서 바다쪽으로 내려오면서 골목을 누볐다. 여관마다 들린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닌데요"
"혹시 바다가 보였습니까"
"기억이 안나요"
이런 식으로 한 시간 정도 헤맨 끝에 눈에 익은 한 여관 앞에 닿았다. 내 여관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택시 기사도 "야, 참 잘 되었습니다"면서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요금도 더 요구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나는 첫 일본여행에서 만났던 이 택시 기사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만큼 일본 홍보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 택시 기사가 나에게 베풀어준 好意가 몇 배의 효과를 보고 있다.
며칠 전 한 전직 장관 K씨로부터 이런 체험담을 들었다.
1990년대 초에 일행과 함께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을 방문했다고 한다. 출발시간이 되어 버스로 돌아가기 위하여 교정을 걸어가다가 유학을 와 있는 친구를 만났다. 서로 손을 잡고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관광 버스 출발시간을 지나치고 말았다. 버스는 다음 행선지인 샌 프란시스코 호텔로 출발한 뒤였다.
난감해진 K씨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마침 책을 들고 지나가는 교수풍의 노신사를 붙잡고 물었다.
"택시를 부를 수 있습니까"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샌프란시스코입니다"
"여기선 곤란한데, 그런데 잠시 봅시다"
그 노교수는 팔목 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되겠는데"라고 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요"라고 하더니 사라졌다. 그리곤 자신의 차를 몰고 오는 것이었다. 노교수는 K씨를 태우고 한 시간 이상을 달려 샌프란시스코 호텔에 도착했다. 미안하기 짝이 없는 K씨는 최상급 인사를 했으나 노교수는 무뚝뚝할 정도로 사무적이었다. 응당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처럼 간단한 인사를 남기곤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고 돌아가버리는 것이었다.
잘 아는 사람에게 친절하기란 쉽다.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을 대하듯이 친절하다면 그는 一流시민이다.
받은 글입니다.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을 대하듯이 친절하다면 그는 一流시민이다.
趙甲濟
1975년 4월 어느 날 저녁 일본을 혼자서 여행하던 나는 유명한 해안 휴양지 아다미(熱海)의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근처의 여관에 들었다. 저녁을 먹을 겸 도시 구경에 나섰다. 택시를 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아차"했다. 여관 이름을 기억해두지 않았다. 명함이나 성냥 곽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우선 택시를 잡아탔다.
"아다미에 여관이 몇 개입니까"
"400개입니다"
택시로 그 400개를 뒤지다간 날이 샐 것 같았다. 택시 운전자에게 여관을 잊어버렸다고 했더니 그는 흔쾌히 말했다.
"같이 찾아봅시다. 그런데 역으로 돌아가서 거꾸로 내려옵시다"
택시기사는 역에서 바다쪽으로 내려오면서 골목을 누볐다. 여관마다 들린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닌데요"
"혹시 바다가 보였습니까"
"기억이 안나요"
이런 식으로 한 시간 정도 헤맨 끝에 눈에 익은 한 여관 앞에 닿았다. 내 여관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택시 기사도 "야, 참 잘 되었습니다"면서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요금도 더 요구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나는 첫 일본여행에서 만났던 이 택시 기사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만큼 일본 홍보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 택시 기사가 나에게 베풀어준 好意가 몇 배의 효과를 보고 있다.
며칠 전 한 전직 장관 K씨로부터 이런 체험담을 들었다.
1990년대 초에 일행과 함께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을 방문했다고 한다. 출발시간이 되어 버스로 돌아가기 위하여 교정을 걸어가다가 유학을 와 있는 친구를 만났다. 서로 손을 잡고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관광 버스 출발시간을 지나치고 말았다. 버스는 다음 행선지인 샌 프란시스코 호텔로 출발한 뒤였다.
난감해진 K씨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마침 책을 들고 지나가는 교수풍의 노신사를 붙잡고 물었다.
"택시를 부를 수 있습니까"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샌프란시스코입니다"
"여기선 곤란한데, 그런데 잠시 봅시다"
그 노교수는 팔목 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되겠는데"라고 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요"라고 하더니 사라졌다. 그리곤 자신의 차를 몰고 오는 것이었다. 노교수는 K씨를 태우고 한 시간 이상을 달려 샌프란시스코 호텔에 도착했다. 미안하기 짝이 없는 K씨는 최상급 인사를 했으나 노교수는 무뚝뚝할 정도로 사무적이었다. 응당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처럼 간단한 인사를 남기곤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고 돌아가버리는 것이었다.
잘 아는 사람에게 친절하기란 쉽다.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을 대하듯이 친절하다면 그는 一流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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