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남자의 자존심
베트남에는 자존심 때문에 상처받은 한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있다.
전쟁이 나면서 젊은 남편은 임신한 아내를 두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몇 년 후 그가 군대에서 돌아왔을 때 마을입구에서 사내아이를 데리고 있는 부인을 발견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렀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준 조상에게 깊이 감사 드렸다.
남편은 아내에게 시장에 가서 조상의 제단에 놓을 과일과 꽃 다른 제물을 사오라고 말했다.
그녀가 물건을 사러 시장에 간 사이 그는 아들에게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이는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저의 아빠가 아니에요. 우리아빠는 매일 밤 집에 왔고, 엄마는 아빠에게 말을 하면 울곤 했어요. 엄마가 앉으면 아빠도 앉았어요. 엄마가 누우면 아빠도 누웠어요.”
그 말을 들은 남자의 가슴은 돌처럼 굳어졌다.
아내가 돌아왔을 때,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조상님께 과일과 꽃 향을 바쳤다. 그리고 절 하고나서 돗자리를 둘둘 말아 아내가 절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아내가 조상들 앞에 나타날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그는 곧장 집을 나가 여러 날 동안 술을 마시고 마을을 돌아 다녔다.
아내는 남편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3일 뒤 그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강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식이 끝난 저녁에 남자가 석유등잔에 불을 붙였다.
그때 어린 아들이 소리쳤다.
“여기 아빠가 있어요.”
아이는 벽에 비친 아빠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는 매일 밤 저렇게 왔어요. 엄마는 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며 많이 울었어요. 엄마가 앉으면 그도 앉았어요. 엄마가 누우면 그도 누웠어요."
아내는 자신의 그림자에 대고 이렇게 소리치곤 했다.
“여보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내 곁에 없군요. 저 혼자 어떻게 저 아이를 키울 수 있겠어요?”
어느 날 밤 아이는 엄마에게 아빠가 누구이고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네 아빠란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도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 순간 젊은 남편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만일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나는 너무 고통스럽소. 매일 밤 어떤 남자가 집에 와서 당신과 이야기하고 함께 울었다고 우리 아이가 말했소. 그리고 당신이 누울 때마다 같이 누웠다고 말했소. 그 남자가 도대체 누구요?” 라고 물었다면 그녀는 설명할 기회를 얻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내도 남편과 똑같이 행동했다. 그동안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힘들게 기다렸는데 남편이 돌아와서 보여준 행동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 또한 자존심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에는 자존심이 들어 설자리가 없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 자신의 고통이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할 때, 이 이야기를 기억하세요.
이야기에 나온 아이의 아빠나 엄마처럼 행동하지 말라. 자존심이 그대의 길을 가로막지 않게 하라.
“사랑하는 이여, 나는 지금 고통 받고 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라고
베트남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다정하게 말하는 것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왜 그랬냐고 한번 물어 보세요. 세상에 이해 못 할 일은 없답니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좋은 글 중에서===
받은 글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 태어나서!!
나에게 서산농장의 의미는 그 옛날 손톱이 달아 없어질 정도로 돌밭을 일궈 고생하셨던 내 아버님 인생에 꼭 바치고 싶었던.... 이 아들의 때늦은 선물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국졸 (國卒)이 내 학력의 전부이고 나는 문장가도 아니며,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될 만한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내는 것은 이 나라를 책임질 젊은이들과 소년 소녀들에게 확고한 신념위에 최선을 다한 노력만 보탠다면 성공의 기회는 누구나 공평하게 타고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싶어서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 이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한 분야에서 내가 성공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나는 신념의 바탕위에 최선을 다한 노력을 쏟아 부으며 이 평등하게 주어진 "자본금" 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사람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정주영
그리운 고향 통천............... 정이 많은 우리 어머님은 자식 사랑도 유난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장남인 나에 대한 정성과 사랑은 끔찍하셨다
우리 어머님은 집에서 한밤중에 장독 위에 물 떠놓으시고 치성 드리는 기도말고도 어디를 가시든..... 큰 바위를 보시든,큰 물을 보시든,산을 보시든,나무를 보시든, 일념으로 나 잘되라는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나는 잘난 아들 정주영이를 낳아놨으니 산신님은 그저 내아들 정주영이 돈을 낳게 해주시오. 이 한 가지 뿐이었다고 한다
단밥먹고 단잠자고
우리 정주영이
동서남북 출입할 때
입술구설 관제구설
낙내수 흉내수
눈 큰 놈 발 큰 놈
천리만리 구만리
남의 눈에 잎이 되고
남의 눈에 꽃이 되어
육지같이 받들어
육근이 청정하고
걸음마다 열매 맺고
말끝마다 향기 나고
천인이 만인이 우러러보게 해주옵소서~!
어린 동생을 토닥거려 재우시면서 밭을 매시면서 길쌈을 하시면서 어머님이 항상 주문처럼 운을 붙여 중얼거리시던 것도 어머님에 대한 추억의 한 자락이다
어머님 성품을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 기도 또한 얼마나 적극적이었을까 알 만하다
현대의 태동.........
무슨일을 하든지 일하는 데에 꾀부리는 버릇이 없는 나는 농사일에 비하면 일도 아닌 쌀가게 일을 하는 데는 우리 아버님이 농사일 하듯이 그야말로 전심전력을 다했다
게으른 난봉꾼 아들 때문에 골치를 썩던 주인아저씨는 열심히 되질과 말질을 배우면서 몸 안 사리고 쓸고 치우고 배달하며 응대도 명랑하게 곧잘 하곤 하는 나를 기특해하고 좋아했다
주인아저씨는 돈은 많아도 배운 게 없어서 장부를 쓸줄을 몰랐고 그저 잡기장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만 적어놓으면 아들이 저녁에 와서 거래처별로 분개장(分介帳 )에 옮겨 적고 재고 파악만 대강대강 하는 정도였다
6개월쯤 되었을때 주인아저씨가 아들을 제치고 나한테 장부 정리를 맡겼다. 그만큼 나를 신임한다는 뜻이었다
엿공장에 취직이 됐을 때에도 기뻤지만 쌀가게에 들어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다. 전차삯 5전을 아끼느라 구두에 징을 박아 신고 출퇴근을 하면서도 신이났고 생활이 조금 나아져 5전짜리 음식대신 10전짜리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을 때의 흐믓함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무일푼으로 고향을 뛰처나온 내가 당대에 어떻게 이처럼 큰 사업을 이룰 수가 있었나 미심쩍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짚어둘 것은 나는 우리 나라 제일의 부자가 아니라 한국 경제 사회에서 세계경제 사회에서 가장 높은 공신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돈을 모아서 돈만으로 이만큼 기업을 이루려 했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나는 현대를 통해서 기업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냈다. 경부고속도로가 그러했고 부산항을 비롯한 항만들이 그러했고 발전소들이 그러했으며 오늘날 우리 나라 전력의 50%를 공급하면서도 사고 없이 높은 가동률을 내는 원자력 발전소도 현대건설의 업적이다
만약 우리 현대가 그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 경제는 최소한 10년에서 20년은 뒤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간은 한순간에도 정지라는 것이 없다. 쉬임없이 흘러 간다. 일 초가 모여 일 분이 되고 분이 모여 시간이 모여 하루가 지나간다
하루가 쌓여 일 년이 가고 십년이 가고 백년 천년이 간다
시간은 지나가 버리면 그만 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다. 누구나 적당히 게으른 재미를 보고 싶고 편한 즐거움을 갖고 싶다
(중략.........)
새도 부지런해야 좋은 먹이를 먹는다. 비슷한 수명을 가지고 비슷한 일생을 사는 동안 어떤이는 남보다 열 배 스무배 일하고 어떤이는 그 몇십분의 일도 못하고 생을 마친다
부지런해야 많이 생각하고 많이 노력해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부지런함은 자기 인생에 대한 성실성이므로 나는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은 일단 신용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사고가 행복을 부른다..........
한창 잘먹고 자랄 나이에 밥보다는 죽을 더 많이 먹으면서 점심은 다반사로 굶어가면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농사일을 할 때도 신통하게도 나는 내 처지가 불행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농촌의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이 고생을 하고 살아야 할까..? 하고 비판한 적도 없다
매사를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느끼고 그 좋은 면을 행복으로 누릴수 있는 소질을 타고난 사람인 것 같다
(중략........)
그러는 한편 언제나 보다 나은 일자리를 찾느라 바빴지 한번도 좌절감이나 실망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 받은 타고난 건강에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근면함만 있으면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는 발전할 것이고
모레는 분명 내일보다 한걸음 더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행복했고 활기찼다
잘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 재산 많은 부자면 행복한 사람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어떤 위치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최선을 다해...... 자기 한테 맡겨진 일을 전심전력으로 이루어내며 현재를 충실히 살 줄 아는 사람은 우선 행복한 사람이다
훌륭한 발전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루하루 발전하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발전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태어나는 환경,조건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 똑같은 것이 있다. 누구의 미래든...... 당신의 발전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발전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미래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건 순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p402~409
출처: 고 정주영 회장의 저서 "이 땅에 태어나서" 에서
~ 옮겨온 글~
받은 글입니다.
즐거운 일을 만들어라
즐거운 일을 만들어라
즐거운 일을 만들어라.
시간을 효율적으로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즐거운 일을 얼마든지
더 만들 수 있고, 그것에 풍덩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웃은지 언제인가.
혹시 일만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내 삶이
얼마나 즐거운지 돌이켜보자.
- 전경일의《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중에서 -
아무리 즐거운 일도 찡그리면서 하면 즐겁지 않은 일로 둔갑하고 아무리 힘든 일도 웃으면서 하면 즐거운 일이 됩니다. '즐거운 일'도 자기가 만드는 위대한 창조작업의 하나입니다. 즐거운 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즐거운 일이 되는 것이니까요.
어렵고 힘들수록 웃으면서 하십시오. 즐거운 일이 많이 생깁니다.
받은 글입니다.
즐거운 일을 만들어라.
시간을 효율적으로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즐거운 일을 얼마든지
더 만들 수 있고, 그것에 풍덩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웃은지 언제인가.
혹시 일만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내 삶이
얼마나 즐거운지 돌이켜보자.
- 전경일의《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중에서 -
아무리 즐거운 일도 찡그리면서 하면 즐겁지 않은 일로 둔갑하고 아무리 힘든 일도 웃으면서 하면 즐거운 일이 됩니다. '즐거운 일'도 자기가 만드는 위대한 창조작업의 하나입니다. 즐거운 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즐거운 일이 되는 것이니까요.
어렵고 힘들수록 웃으면서 하십시오. 즐거운 일이 많이 생깁니다.
받은 글입니다.
넘어져 봐라
넘어져 봐라
넘어져 봐라. 산악인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정상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승진에서 미끄러지고, 실직을 하는 등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 쓰라리고 아픈 경험은 어느 누구라도 한 번씩은 겪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넘어져 봤으니 아는 게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재산이 된다.
- 전경일의《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중에서 -
넘어졌을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납니다. 넘어지는 순간 한번에 무너져 버리는 사람이 있고,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장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물을 고통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고, 다시없는 교훈과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애물을 만나 넘어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마십시오. 엄청난 재산을 얻는 순간이니까요.
받은 글입니다.
넘어져 봐라. 산악인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정상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승진에서 미끄러지고, 실직을 하는 등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 쓰라리고 아픈 경험은 어느 누구라도 한 번씩은 겪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넘어져 봤으니 아는 게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재산이 된다.
- 전경일의《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중에서 -
넘어졌을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납니다. 넘어지는 순간 한번에 무너져 버리는 사람이 있고,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장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물을 고통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고, 다시없는 교훈과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애물을 만나 넘어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마십시오. 엄청난 재산을 얻는 순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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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분수정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분수정원
Summer Palace, Saint Petersburg, Russia
여름궁전에서 가장 큰 건축물은 언덕 위에 있는 대궁전과 그 앞의 계단식 폭포, 그리고 그 주변의 조각상들과 64개의 분수이다. 삼손이라 불리는 대분수에서 시작되는 운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배들이 도착하는 핀란드만까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궁전은 1714년~1725년에 걸쳐 완성되었지만 현재의 바로크풍 장식은 겨울궁전을 건축한 라스트 렐리에 의해 1745년부터 10년간의 공사로 만들어졌다.
Summer Palace, Saint Petersburg, Russia
여름궁전에서 가장 큰 건축물은 언덕 위에 있는 대궁전과 그 앞의 계단식 폭포, 그리고 그 주변의 조각상들과 64개의 분수이다. 삼손이라 불리는 대분수에서 시작되는 운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배들이 도착하는 핀란드만까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궁전은 1714년~1725년에 걸쳐 완성되었지만 현재의 바로크풍 장식은 겨울궁전을 건축한 라스트 렐리에 의해 1745년부터 10년간의 공사로 만들어졌다.
일본 대학생들의 박정희 예찬(禮讚)
일본 대학생들의 박정희 예찬(禮讚)
그들은 박정희의 가장 큰 장점을 청렴함이라고 했다.
日학생들 "박정희를 부정하면 마치 민주화 세대인 것처럼 자부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도 민주주의를 모르는 나라"
장진성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 음식점에서 어제 밤 일본 대학생들과 장시간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물론 내가 아니라 한국말을 잘하는 그들 때문에 우리는 서로 교감할 수 있었다. 국제외교정치를 전공하는 그들은 연세대와 고려대 유학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이 해안포를 발사하면 그 소리가 한국에서보다 더 크게 들리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그만큼 안정된 질서와 기나긴 평화에 체질화 된 일본인들이어선지 분단 상황이면서도 드라마틱한 이웃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컸다.
나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랍게도 일제히 박정희! 라고 합창했다. 한국 대학생들에게서도 잘 듣지 못한 말을 일본 대학생들에게 듣는 순간 전율 같은 감동이 솟구쳤다. 아니 그들은 나보다도 박정희 대통령을 더 존경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우선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장점을 청렴함이라고 했다. 미리 준비하고 서거한 것도 아닌데, 총에 맞아 급사했는데도 자기와 가족을 위한 비자금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에 일본이 3억 달러를 원조했을 때도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 대통령들 같은 경우 그 돈을 횡령하여 혼자만 부자가 된 반면, 박대통령은 고스란히 국민을 위한 경제개발에 돌렸다는 것이다.
나는 어설픈 상식으로 김일성은 세습권력을 위한 독재를 했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위한 독재를 했다며 분단시대의 두 長期(장기) 체제를 비교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선 개발독재라는 표현도 일본 대학생들은 개발독선(獨善)이라고 했다. 박대통령이 비록 밀어붙였지만 결국은 옳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그때 고속도로를 반대했던 이른바 민주투사들이란 사람들이 과연 역사 앞에 진실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전기를 아끼느라 청와대 에어컨을 끄고 파리채를 들었던 사실이며 서거 당시 착용했던 낡은 벨트와 구두, 화장실 변기에 사용했던 벽돌까지 그들은 박대통령 일화를 참으로 많이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었는가 물었더니 박대통령을 연구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조갑제닷컴'에서 출판한 박정희전기를 모두 읽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우리 한국 대학생들 중 13권에 이르는 그 방대한 전기를 끝까지 읽은 학생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 하고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 덕에 살면서도 그 위업을 경시하는 한국의 현대사를 편향된 일방적 민주주의라고 규정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솔직한 역사인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국은 민주화의 역사만을 정당화한다고 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한강에는 그 상징물이 없는 나라이다.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이 바로 역사정립이고 후대의 예의가 아니겠냐며 한국은 일본의 과거를 자꾸 문제 삼는데 우선 저들의 현재부터 바로 세우라고 비판했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 같은 인물이 먼 옛날이 아니라 우리 부모세대에 일본을 구원했다면 자기들은 우리의 가까운 역사로 자부심을 가지겠지만 한국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며 매우 이상해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있을 당시 한국 대학생들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논쟁했던 이야기를 했다.
한국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일 뿐이고 왜 독재를 하게 됐는지, 그 결과가 과연 비참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도, 분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마치 그들의 주장은 논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고의 형식과 틀에 의존한 교과서 같았다. 박정희를 부정하면 마치 민주화 세대인 것처럼 자부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도 민주주의를 모르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광우병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웃음으로 비판했다. 이념이나 국민건강문제에 대한 우려를 떠나 시위자들의 사회적응 심리부터가 잘 못됐다는 것이다. 일본은 어디 가나 스미마셍으로 통한다. 남에게 불편을 줄 때는 물론 부를 때도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다. 그래서 미안하지 않기 위해 거리에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공동장소에서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하며 자기 집 앞은 깨끗이 청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잦은 시위들을 보면 남들에게 불편을 끼쳐서라도 자기들의 뜻을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잘못된 국민정서의 결정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용인되는 사회. 아니 법치에 도전해도 된다는 시민의식이 바로 한국의 대표적인 후진성이라고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일본의 한류열풍에 대한 이야기로 즐겁게 술잔을 나누었다.
나는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할 줄 아는 일본 대학생들을 위해 오늘 밥값은 내가 내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더치페이가 민주주의라며 각자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감사함을 무엇으로든 표현하고 싶어 2차 노래방 값은 그들 몰래 내가 계산했다.
받은 글입니다.
공감가는 부분도 아닌 부분도 있지만, 정치색을 떠나서 생각해 볼만한 분이셨다고 생각되어 올립니다.
그들은 박정희의 가장 큰 장점을 청렴함이라고 했다.
日학생들 "박정희를 부정하면 마치 민주화 세대인 것처럼 자부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도 민주주의를 모르는 나라"
장진성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 음식점에서 어제 밤 일본 대학생들과 장시간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물론 내가 아니라 한국말을 잘하는 그들 때문에 우리는 서로 교감할 수 있었다. 국제외교정치를 전공하는 그들은 연세대와 고려대 유학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이 해안포를 발사하면 그 소리가 한국에서보다 더 크게 들리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그만큼 안정된 질서와 기나긴 평화에 체질화 된 일본인들이어선지 분단 상황이면서도 드라마틱한 이웃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컸다.
나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랍게도 일제히 박정희! 라고 합창했다. 한국 대학생들에게서도 잘 듣지 못한 말을 일본 대학생들에게 듣는 순간 전율 같은 감동이 솟구쳤다. 아니 그들은 나보다도 박정희 대통령을 더 존경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우선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장점을 청렴함이라고 했다. 미리 준비하고 서거한 것도 아닌데, 총에 맞아 급사했는데도 자기와 가족을 위한 비자금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에 일본이 3억 달러를 원조했을 때도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 대통령들 같은 경우 그 돈을 횡령하여 혼자만 부자가 된 반면, 박대통령은 고스란히 국민을 위한 경제개발에 돌렸다는 것이다.
나는 어설픈 상식으로 김일성은 세습권력을 위한 독재를 했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위한 독재를 했다며 분단시대의 두 長期(장기) 체제를 비교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선 개발독재라는 표현도 일본 대학생들은 개발독선(獨善)이라고 했다. 박대통령이 비록 밀어붙였지만 결국은 옳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그때 고속도로를 반대했던 이른바 민주투사들이란 사람들이 과연 역사 앞에 진실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전기를 아끼느라 청와대 에어컨을 끄고 파리채를 들었던 사실이며 서거 당시 착용했던 낡은 벨트와 구두, 화장실 변기에 사용했던 벽돌까지 그들은 박대통령 일화를 참으로 많이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었는가 물었더니 박대통령을 연구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조갑제닷컴'에서 출판한 박정희전기를 모두 읽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우리 한국 대학생들 중 13권에 이르는 그 방대한 전기를 끝까지 읽은 학생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 하고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 덕에 살면서도 그 위업을 경시하는 한국의 현대사를 편향된 일방적 민주주의라고 규정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솔직한 역사인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국은 민주화의 역사만을 정당화한다고 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한강에는 그 상징물이 없는 나라이다.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이 바로 역사정립이고 후대의 예의가 아니겠냐며 한국은 일본의 과거를 자꾸 문제 삼는데 우선 저들의 현재부터 바로 세우라고 비판했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 같은 인물이 먼 옛날이 아니라 우리 부모세대에 일본을 구원했다면 자기들은 우리의 가까운 역사로 자부심을 가지겠지만 한국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며 매우 이상해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있을 당시 한국 대학생들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논쟁했던 이야기를 했다.
한국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일 뿐이고 왜 독재를 하게 됐는지, 그 결과가 과연 비참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도, 분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마치 그들의 주장은 논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고의 형식과 틀에 의존한 교과서 같았다. 박정희를 부정하면 마치 민주화 세대인 것처럼 자부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도 민주주의를 모르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광우병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웃음으로 비판했다. 이념이나 국민건강문제에 대한 우려를 떠나 시위자들의 사회적응 심리부터가 잘 못됐다는 것이다. 일본은 어디 가나 스미마셍으로 통한다. 남에게 불편을 줄 때는 물론 부를 때도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다. 그래서 미안하지 않기 위해 거리에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공동장소에서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하며 자기 집 앞은 깨끗이 청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잦은 시위들을 보면 남들에게 불편을 끼쳐서라도 자기들의 뜻을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잘못된 국민정서의 결정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용인되는 사회. 아니 법치에 도전해도 된다는 시민의식이 바로 한국의 대표적인 후진성이라고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일본의 한류열풍에 대한 이야기로 즐겁게 술잔을 나누었다.
나는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할 줄 아는 일본 대학생들을 위해 오늘 밥값은 내가 내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더치페이가 민주주의라며 각자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감사함을 무엇으로든 표현하고 싶어 2차 노래방 값은 그들 몰래 내가 계산했다.
받은 글입니다.
공감가는 부분도 아닌 부분도 있지만, 정치색을 떠나서 생각해 볼만한 분이셨다고 생각되어 올립니다.
雲甫 김기창 화백의 감동 강연
♣ 雲甫 김기창 화백의 감동 강연 ♣
마이크 잡은 雲甫 김기창 화백의 외마디 "벼씨 새끼트라!" (병신 새끼들아!)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설립된 청송교도소는 교화대상에서 제외한 다른 교도소의 고질적인 전과자나 흉악한 범죄자들만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그 시절 ‘청송교도소’라면 ‘빠삐용 요새’라는 별칭처럼 ‘날짐승마저도 피해 간다.’는 무시무시한 퍼런 기들이 날아다녔던 곳이었다.
죄질이 흉악한 범죄인들 200여명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마음먹기에 따라 행했던 자들로, 그들에게서 뿜어 나오는 드센 기에 보통 사람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70이 넘은 운보 화백은 그 칼날이 시퍼런 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의 특유한 대화체로 ‘병신 새끼들아!’는 욕으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운보 화백이 청송교도소에 온 배경에는 삼중스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시절 삼중스님은 사형수를 교화하기 위하여 청송교도소를 드나들었다.
하루는 교도소장이 삼중스님에게 부탁이 있다면서 ‘삼중스님이 운보 화백님을 잘 아시지요?’ 하는 말을 던졌다. 삼중스님은 운보 화백과는 안면이 없었던 시절이라 자신에게 운보 화백을 묻는 이유를 궁금해 하였다.
“다른 교도소에서도 재소자들의 마음을 교화하기 쉽지 않은데, 이 청송에서는 더욱 더 힘이 듭니다. 좋은 미술품을 재소자들에게 보여서 그들에게 편안한 마음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교도소장의 말에 감동한 삼중스님은 ‘내가 한번 알아보겠다.’는 답변으로 전혀 만난 적이 없던 화백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청송교도소의 벽에 운보 화백의 그림을 걸고자 한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려는 깊은 뜻에서 그림을 기부 받고 싶다.”
무슨 일이든 좋은 마음에서 덤비면 뭐든지 이루어진다는 소신만이 삼중스님의 장기 중의 특기였다. 뜻밖에도 운보 화백의 아들이 삼중스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버님이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답니다. 자신이 직접 청송교도소로 그림을 가지고 가고 싶답니다.”
이 답변 또한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 시절 운보 화백의 혈기와 명성은 그가 지닌 최정상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라서 그런지 운보 화백은 그림 10점을 하루 동안에 그리는 정열이 있었다.
재소자들을 위해서 운보 자신의 귀중한 하루를 보내려는 그의 깊은 속뜻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유명한 화백들이 기부한 그림 50점을 기념하는 행사는 청송교도소 앞마당에서 열렸다. 행사에 참가하려는 삼중스님은 운보 화백을 처음으로 만나 같이 동행하여 내려갔다.
간단한 식순에 맞추어 삼중스님은 재소자들 200여명이 도열한 앞마당에서 금강경을 법문했다. 삼중스님이 법문을 끝낸 후 자리에 앉으려하자 운보 자신도 강연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행사 식순에 없던 갑작스런 그의 강연의사에 진행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분위기에도 ‘나또 하마띠 타고 시타(나도 한마디 하고 싶다)’ 는 의사표현을 강하게 했다.
운보 화백의 모습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말을 재소자에게 들려주어야 한다고 때를 쓰는 듯 했다. 그래서 삼중스님은 주변의 양해를 구하고 연단에 그의 손을 잡고 올라갔다.
첫 마디부터 심상치 않았다.
“벼씨 새끼트라! (병신 새끼들아!)”
이 첫 마디에 연단 옆에 서 있던 삼중스님은 화들짝 놀랐다. 청송교도소 200여명이 있는 이곳에서 욕을 했다. 청송교도소로 내려오는 동안 차안에서 화백의 특이한 대화체에 어느 정도 익숙했던지라 삼중스님은 욕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들을 수 있었다.
파랗게 놀란 눈으로 앞마당 재소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잠시 출렁이더니 조금 지나자 조용해졌다. 화백의 말은 이어졌다.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그렇지만 나는 몸은 병신이지만 정신만은 건강하다. 그런데 당신들은 몸은 건강하나 정신은 병신이다. 그래서 내가 욕을 한 것이다. 나같이 몸이 병신이지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나는 타고난 재주나 조건을 믿지 않았다. 내 재주를 갈고 닦아서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왜 건강한 몸으로 이런 무시무시한 교도소에 들어와서 이 지옥에서 죽을 고생들을 하느냐?” 며 재소자들을 몰아 세웠다.
만약 운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욕을 했다면 아마도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후문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운보 화백의 말에는 진실로 그들을 아끼는 마음을 느꼈던지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더니 숙연하게 듣고 있었다.
참 이 기막힌 장면에 모두가 많이도 놀랬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받은 진실한 선물은 재소자, 교도관, 그리고 참가한 사람들 모두에게 커다란 마음의 출렁임을 주었다.
그 날 운보 화백은 법무부장관의 공로패를 받았다. 공식 행사를 끝낸 후 청송교도소를 나오려하자 운보 화백의 고집은 이어졌다.
운보 자신과 같은 처지인 벙어리 재소자를 만나 보고자 하는데 문제는 장소였다. 청각장애 재소자들이 먹고 자는 감방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만나야겠다는 황소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청각장애자가 수감된 감방’이라는 장소를 지적하는 그의 고집에 주변사람들의 애간장을 끓게 하였다. 아무리 말려보아도 소용이 없자, 삼중스님은 법무부 고위 관리에게 법무처의 특별 허락을 부탁했다. 드디어 운보 화백은 청각장애 재소자의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삼중스님도 그를 따라 처음으로 감방안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감방 안에 들어 선 운보 화백은 벙어리 재소자를 꽉 껴안더니 볼을 비비면서 울었어요. ‘병신된 것도 서러운데 왜 이런 생지옥에서 이리 서럽게 살고 있느냐?’ 울음 속에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어요. 볼을 서로 비비면서 우는 통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저절로 나왔어요. 통곡으로 변해 서로 엉켜진 몸 타래를 풀어내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진정한 우애의 정을 내비치는 운보 화백의 모습에 삼중스님과 교도관들은 녹아 내렸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는 삼중스님을 따라 운보 화백도 저 먼 제주교도소까지 다니면서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더 귀중하게 사용했다.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끈끈한 정을 보이는 운보 화백에게 확연히 상이한 모습도 있었다. 그것은 권력과 재력에 휘둘리지 않는 그의 곧은 기질은 소문으로도 대단하였다.
한 번은 법무부 장관의 청탁에 의해 운보 자신의 그림 한 점을 법무연수원에 기부받기를 원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의 작품 한 점이 시중에서 3천만 원에 거래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는 기부를 원했던 법무부장관에게 작품가 5천만 원에 판매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던졌다.
삼중스님이 곁에서 지켜 본 운보 화백의 끈끈한 정은 그의 어머니에게 나왔다고 했다.
“운보 화백은 참 효자였어요. 청주에 있는 화실에서 내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를 모셨어요. 그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자신의 화실 창문에서 바라본 어머니 묘지의 정경이라고 했습니다.”
운보 화백이 청송교도소 강연장에서 내지른 외마디. ‘벼씨 새끼트라!’ 는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외마디 욕을 내지르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받은 글입니다.
마이크 잡은 雲甫 김기창 화백의 외마디 "벼씨 새끼트라!" (병신 새끼들아!)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설립된 청송교도소는 교화대상에서 제외한 다른 교도소의 고질적인 전과자나 흉악한 범죄자들만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그 시절 ‘청송교도소’라면 ‘빠삐용 요새’라는 별칭처럼 ‘날짐승마저도 피해 간다.’는 무시무시한 퍼런 기들이 날아다녔던 곳이었다.
죄질이 흉악한 범죄인들 200여명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마음먹기에 따라 행했던 자들로, 그들에게서 뿜어 나오는 드센 기에 보통 사람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70이 넘은 운보 화백은 그 칼날이 시퍼런 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의 특유한 대화체로 ‘병신 새끼들아!’는 욕으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운보 화백이 청송교도소에 온 배경에는 삼중스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시절 삼중스님은 사형수를 교화하기 위하여 청송교도소를 드나들었다.
하루는 교도소장이 삼중스님에게 부탁이 있다면서 ‘삼중스님이 운보 화백님을 잘 아시지요?’ 하는 말을 던졌다. 삼중스님은 운보 화백과는 안면이 없었던 시절이라 자신에게 운보 화백을 묻는 이유를 궁금해 하였다.
“다른 교도소에서도 재소자들의 마음을 교화하기 쉽지 않은데, 이 청송에서는 더욱 더 힘이 듭니다. 좋은 미술품을 재소자들에게 보여서 그들에게 편안한 마음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교도소장의 말에 감동한 삼중스님은 ‘내가 한번 알아보겠다.’는 답변으로 전혀 만난 적이 없던 화백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청송교도소의 벽에 운보 화백의 그림을 걸고자 한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려는 깊은 뜻에서 그림을 기부 받고 싶다.”
무슨 일이든 좋은 마음에서 덤비면 뭐든지 이루어진다는 소신만이 삼중스님의 장기 중의 특기였다. 뜻밖에도 운보 화백의 아들이 삼중스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버님이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답니다. 자신이 직접 청송교도소로 그림을 가지고 가고 싶답니다.”
이 답변 또한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 시절 운보 화백의 혈기와 명성은 그가 지닌 최정상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라서 그런지 운보 화백은 그림 10점을 하루 동안에 그리는 정열이 있었다.
재소자들을 위해서 운보 자신의 귀중한 하루를 보내려는 그의 깊은 속뜻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유명한 화백들이 기부한 그림 50점을 기념하는 행사는 청송교도소 앞마당에서 열렸다. 행사에 참가하려는 삼중스님은 운보 화백을 처음으로 만나 같이 동행하여 내려갔다.
간단한 식순에 맞추어 삼중스님은 재소자들 200여명이 도열한 앞마당에서 금강경을 법문했다. 삼중스님이 법문을 끝낸 후 자리에 앉으려하자 운보 자신도 강연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행사 식순에 없던 갑작스런 그의 강연의사에 진행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분위기에도 ‘나또 하마띠 타고 시타(나도 한마디 하고 싶다)’ 는 의사표현을 강하게 했다.
운보 화백의 모습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말을 재소자에게 들려주어야 한다고 때를 쓰는 듯 했다. 그래서 삼중스님은 주변의 양해를 구하고 연단에 그의 손을 잡고 올라갔다.
첫 마디부터 심상치 않았다.
“벼씨 새끼트라! (병신 새끼들아!)”
이 첫 마디에 연단 옆에 서 있던 삼중스님은 화들짝 놀랐다. 청송교도소 200여명이 있는 이곳에서 욕을 했다. 청송교도소로 내려오는 동안 차안에서 화백의 특이한 대화체에 어느 정도 익숙했던지라 삼중스님은 욕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들을 수 있었다.
파랗게 놀란 눈으로 앞마당 재소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잠시 출렁이더니 조금 지나자 조용해졌다. 화백의 말은 이어졌다.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그렇지만 나는 몸은 병신이지만 정신만은 건강하다. 그런데 당신들은 몸은 건강하나 정신은 병신이다. 그래서 내가 욕을 한 것이다. 나같이 몸이 병신이지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나는 타고난 재주나 조건을 믿지 않았다. 내 재주를 갈고 닦아서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왜 건강한 몸으로 이런 무시무시한 교도소에 들어와서 이 지옥에서 죽을 고생들을 하느냐?” 며 재소자들을 몰아 세웠다.
만약 운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욕을 했다면 아마도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후문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운보 화백의 말에는 진실로 그들을 아끼는 마음을 느꼈던지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더니 숙연하게 듣고 있었다.
참 이 기막힌 장면에 모두가 많이도 놀랬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받은 진실한 선물은 재소자, 교도관, 그리고 참가한 사람들 모두에게 커다란 마음의 출렁임을 주었다.
그 날 운보 화백은 법무부장관의 공로패를 받았다. 공식 행사를 끝낸 후 청송교도소를 나오려하자 운보 화백의 고집은 이어졌다.
운보 자신과 같은 처지인 벙어리 재소자를 만나 보고자 하는데 문제는 장소였다. 청각장애 재소자들이 먹고 자는 감방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만나야겠다는 황소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청각장애자가 수감된 감방’이라는 장소를 지적하는 그의 고집에 주변사람들의 애간장을 끓게 하였다. 아무리 말려보아도 소용이 없자, 삼중스님은 법무부 고위 관리에게 법무처의 특별 허락을 부탁했다. 드디어 운보 화백은 청각장애 재소자의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삼중스님도 그를 따라 처음으로 감방안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감방 안에 들어 선 운보 화백은 벙어리 재소자를 꽉 껴안더니 볼을 비비면서 울었어요. ‘병신된 것도 서러운데 왜 이런 생지옥에서 이리 서럽게 살고 있느냐?’ 울음 속에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어요. 볼을 서로 비비면서 우는 통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저절로 나왔어요. 통곡으로 변해 서로 엉켜진 몸 타래를 풀어내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진정한 우애의 정을 내비치는 운보 화백의 모습에 삼중스님과 교도관들은 녹아 내렸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는 삼중스님을 따라 운보 화백도 저 먼 제주교도소까지 다니면서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더 귀중하게 사용했다.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끈끈한 정을 보이는 운보 화백에게 확연히 상이한 모습도 있었다. 그것은 권력과 재력에 휘둘리지 않는 그의 곧은 기질은 소문으로도 대단하였다.
한 번은 법무부 장관의 청탁에 의해 운보 자신의 그림 한 점을 법무연수원에 기부받기를 원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의 작품 한 점이 시중에서 3천만 원에 거래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는 기부를 원했던 법무부장관에게 작품가 5천만 원에 판매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던졌다.
삼중스님이 곁에서 지켜 본 운보 화백의 끈끈한 정은 그의 어머니에게 나왔다고 했다.
“운보 화백은 참 효자였어요. 청주에 있는 화실에서 내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를 모셨어요. 그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자신의 화실 창문에서 바라본 어머니 묘지의 정경이라고 했습니다.”
운보 화백이 청송교도소 강연장에서 내지른 외마디. ‘벼씨 새끼트라!’ 는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외마디 욕을 내지르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받은 글입니다.
물 건강 7계명
물 건강 7계명
단 하루도 물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제대로 마시는 사람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물을 건강하게 마시는 방법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냉장고에 붙여두고 온 가족이 실천하거나, 다이어리에 끼워 넣고 다니면 좋은 물 건강 7계명.
1. 하루에 반드시 7~8컵 이상을 공복에 마신다.
2. 가능한 실온에 두고 마신다.
3. 받아놓은 물은 밀폐해서 24시간 안에 마신다.
4. 미네랄이 함유된 물은 가능한 한 끓이지 말고 생수로 마신다.
5. 마시는 물은 알칼리성, 씻는 물은 약산성이 바람직하다.
6. 음주 후엔 반드시 2컵 이상의 찬물을 마신다.
7. 물은 천천히 마신다.
-여성조선 이덕진 기자, 자료제공: 뉴온, 미국 하버드 의대 '건강 생활 요령'-
노화와 함께 갈증을 느끼게 하는 관도 따라서 퇴화 한답니다. 따라서 물 마시는 것도 습관화해두시면 노년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며 항상 건강과 더불어 촉촉 피부도 함께 할 수 있답니다.
받은 글입니다.
단 하루도 물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제대로 마시는 사람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물을 건강하게 마시는 방법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냉장고에 붙여두고 온 가족이 실천하거나, 다이어리에 끼워 넣고 다니면 좋은 물 건강 7계명.
1. 하루에 반드시 7~8컵 이상을 공복에 마신다.
2. 가능한 실온에 두고 마신다.
3. 받아놓은 물은 밀폐해서 24시간 안에 마신다.
4. 미네랄이 함유된 물은 가능한 한 끓이지 말고 생수로 마신다.
5. 마시는 물은 알칼리성, 씻는 물은 약산성이 바람직하다.
6. 음주 후엔 반드시 2컵 이상의 찬물을 마신다.
7. 물은 천천히 마신다.
-여성조선 이덕진 기자, 자료제공: 뉴온, 미국 하버드 의대 '건강 생활 요령'-
노화와 함께 갈증을 느끼게 하는 관도 따라서 퇴화 한답니다. 따라서 물 마시는 것도 습관화해두시면 노년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며 항상 건강과 더불어 촉촉 피부도 함께 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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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물 건강 생활법
♡♤ 24시간 물 건강 생활법 ♤♡
- 하루에 7잔 이상 마신다! -
물은 어떤 물을 어떻게 마시는지가 중요하다. 하루에 7~8잔 마시라고 하는데 언제 마시면 가장 좋은지? 하루의 생활을 따라가며 구성해본다.
◆ AM 07:00 기상 직후 물 한 잔
기상 직후 물을 한 잔 마시면 밤새 축적된 노폐물을 용해시켜 몸 밖으로 배출시키므로 체내의 신진대사를 촉진시키고 원활한 혈액순환을 도우며 신장의 부담을 덜어준다. 더욱이 배설 기능이 강화되어 변비 예방이나 치료는 물론 하루의 컨디션을 가볍게 시작할 수 있다.
◆ AM 08:00 아침식사 전 물 한 잔
식사 전에 물을 한 잔 마시면 위장의 컨디션을 조절하며, 과식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 AM 10:00 근무중 물 한 잔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다 지치거나 피로해질 때 찬물 한 컵을 마시면 피로도 풀리고 지루함을 덜어준다. 또한 물은 흡연 욕구를 자제시키므로 담배를 많이 피우는 흡연가들의 건강 예방에도 좋다.
◆ PM 12:00 점심식사 전 물 한 잔
점심식사 직전에 물을 한 잔 마시면 과식을 막아준다. 특히 외식을 많이 하는 직장인의 점심은 식당의 음식이 전반적으로 짜거나 매운데, 이때 중간 중간에 물을 조금씩 마셔주면 체내 염분 조절이 이루어지므로 성인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 PM 03:00 공복에 물 한 잔
오후 3시경은 군것질 욕구가 생기거나 흡연 욕구가 강해지는 시간. 이때 군것질이나 담배 대신 물을 한 잔 마시면 군것질 욕구도 사라지고 흡연 욕구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 PM 07:00 저녁식사와 함께 물 한 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식하게 되는 저녁식사 중간 중간에 물을 조금씩 마셔주면 체내 염분 조절도 이루어지므로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되며 과식을 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 PM 10:00 잠자리 전 물 한 잔
잠자기 전 미네랄 풍부한 물을 마시면 다음날 훨씬 가벼운 몸 상태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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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에 7잔 이상 마신다! -
물은 어떤 물을 어떻게 마시는지가 중요하다. 하루에 7~8잔 마시라고 하는데 언제 마시면 가장 좋은지? 하루의 생활을 따라가며 구성해본다.
◆ AM 07:00 기상 직후 물 한 잔
기상 직후 물을 한 잔 마시면 밤새 축적된 노폐물을 용해시켜 몸 밖으로 배출시키므로 체내의 신진대사를 촉진시키고 원활한 혈액순환을 도우며 신장의 부담을 덜어준다. 더욱이 배설 기능이 강화되어 변비 예방이나 치료는 물론 하루의 컨디션을 가볍게 시작할 수 있다.
◆ AM 08:00 아침식사 전 물 한 잔
식사 전에 물을 한 잔 마시면 위장의 컨디션을 조절하며, 과식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 AM 10:00 근무중 물 한 잔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다 지치거나 피로해질 때 찬물 한 컵을 마시면 피로도 풀리고 지루함을 덜어준다. 또한 물은 흡연 욕구를 자제시키므로 담배를 많이 피우는 흡연가들의 건강 예방에도 좋다.
◆ PM 12:00 점심식사 전 물 한 잔
점심식사 직전에 물을 한 잔 마시면 과식을 막아준다. 특히 외식을 많이 하는 직장인의 점심은 식당의 음식이 전반적으로 짜거나 매운데, 이때 중간 중간에 물을 조금씩 마셔주면 체내 염분 조절이 이루어지므로 성인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 PM 03:00 공복에 물 한 잔
오후 3시경은 군것질 욕구가 생기거나 흡연 욕구가 강해지는 시간. 이때 군것질이나 담배 대신 물을 한 잔 마시면 군것질 욕구도 사라지고 흡연 욕구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 PM 07:00 저녁식사와 함께 물 한 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식하게 되는 저녁식사 중간 중간에 물을 조금씩 마셔주면 체내 염분 조절도 이루어지므로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되며 과식을 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 PM 10:00 잠자리 전 물 한 잔
잠자기 전 미네랄 풍부한 물을 마시면 다음날 훨씬 가벼운 몸 상태를 느낄 수 있다.
받은 글입니다.
토인비의 `청어 이야기'
토인비의 `청어 이야기'
`세계적 역사가 토인비박사가 즐겨 하던 이야기이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 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먼 거리의 런던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운반하는가의 문제였다. 어부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 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 있었다. 그러나 꼭 한 어부의 청어만은 싱싱하게 산채로 있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동료 어부들이 그 이유를 물어 보았으나 그 어부는 좀채로 그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마침내 동료들의 강요에 못이긴 어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청어를 넣은 통에다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
그러자 동료 어부들이 놀라 물었다.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 않습니까?”
어부는 말했다. “네,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놈은 청어를 두세 마리밖에 못 잡아먹지요. 하지만 그 통 안에 있는 수백 마리의 청어들은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살기 위해 열심히 헤엄치고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 길 후에 런던에 도착해 봐도 청어들은 여전히 살아 싱싱합니다.”
메기로부터 살아나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청어들을 건강하게 살아있게 한 것이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의 촉진제가 된다고들 하지요. 또 삶에 있어.. 풀리지 않는 숙제를 갖고 있는 이들의 생의 애착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더 강하다고도 합니다. 어쩌면, 삶에 있어서의 고난은 그것이 아픔과 고통일지라도 애써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생존의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받은 글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메기론으로 더 많이들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원래는 토인비가 했던 이야기인가 봅니다.
`세계적 역사가 토인비박사가 즐겨 하던 이야기이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 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먼 거리의 런던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운반하는가의 문제였다. 어부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 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 있었다. 그러나 꼭 한 어부의 청어만은 싱싱하게 산채로 있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동료 어부들이 그 이유를 물어 보았으나 그 어부는 좀채로 그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마침내 동료들의 강요에 못이긴 어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청어를 넣은 통에다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
그러자 동료 어부들이 놀라 물었다.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 않습니까?”
어부는 말했다. “네,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놈은 청어를 두세 마리밖에 못 잡아먹지요. 하지만 그 통 안에 있는 수백 마리의 청어들은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살기 위해 열심히 헤엄치고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 길 후에 런던에 도착해 봐도 청어들은 여전히 살아 싱싱합니다.”
메기로부터 살아나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청어들을 건강하게 살아있게 한 것이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의 촉진제가 된다고들 하지요. 또 삶에 있어.. 풀리지 않는 숙제를 갖고 있는 이들의 생의 애착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더 강하다고도 합니다. 어쩌면, 삶에 있어서의 고난은 그것이 아픔과 고통일지라도 애써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생존의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받은 글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메기론으로 더 많이들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원래는 토인비가 했던 이야기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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