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일을 만들어라
즐거운 일을 만들어라.
시간을 효율적으로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즐거운 일을 얼마든지
더 만들 수 있고, 그것에 풍덩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웃은지 언제인가.
혹시 일만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내 삶이
얼마나 즐거운지 돌이켜보자.
- 전경일의《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중에서 -
아무리 즐거운 일도 찡그리면서 하면 즐겁지 않은 일로 둔갑하고 아무리 힘든 일도 웃으면서 하면 즐거운 일이 됩니다. '즐거운 일'도 자기가 만드는 위대한 창조작업의 하나입니다. 즐거운 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즐거운 일이 되는 것이니까요.
어렵고 힘들수록 웃으면서 하십시오. 즐거운 일이 많이 생깁니다.
받은 글입니다.
넘어져 봐라
넘어져 봐라
넘어져 봐라. 산악인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정상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승진에서 미끄러지고, 실직을 하는 등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 쓰라리고 아픈 경험은 어느 누구라도 한 번씩은 겪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넘어져 봤으니 아는 게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재산이 된다.
- 전경일의《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중에서 -
넘어졌을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납니다. 넘어지는 순간 한번에 무너져 버리는 사람이 있고,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장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물을 고통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고, 다시없는 교훈과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애물을 만나 넘어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마십시오. 엄청난 재산을 얻는 순간이니까요.
받은 글입니다.
넘어져 봐라. 산악인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정상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승진에서 미끄러지고, 실직을 하는 등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 쓰라리고 아픈 경험은 어느 누구라도 한 번씩은 겪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넘어져 봤으니 아는 게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재산이 된다.
- 전경일의《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중에서 -
넘어졌을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납니다. 넘어지는 순간 한번에 무너져 버리는 사람이 있고,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장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물을 고통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고, 다시없는 교훈과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애물을 만나 넘어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마십시오. 엄청난 재산을 얻는 순간이니까요.
받은 글입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분수정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분수정원
Summer Palace, Saint Petersburg, Russia
여름궁전에서 가장 큰 건축물은 언덕 위에 있는 대궁전과 그 앞의 계단식 폭포, 그리고 그 주변의 조각상들과 64개의 분수이다. 삼손이라 불리는 대분수에서 시작되는 운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배들이 도착하는 핀란드만까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궁전은 1714년~1725년에 걸쳐 완성되었지만 현재의 바로크풍 장식은 겨울궁전을 건축한 라스트 렐리에 의해 1745년부터 10년간의 공사로 만들어졌다.
Summer Palace, Saint Petersburg, Russia
여름궁전에서 가장 큰 건축물은 언덕 위에 있는 대궁전과 그 앞의 계단식 폭포, 그리고 그 주변의 조각상들과 64개의 분수이다. 삼손이라 불리는 대분수에서 시작되는 운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배들이 도착하는 핀란드만까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궁전은 1714년~1725년에 걸쳐 완성되었지만 현재의 바로크풍 장식은 겨울궁전을 건축한 라스트 렐리에 의해 1745년부터 10년간의 공사로 만들어졌다.
일본 대학생들의 박정희 예찬(禮讚)
일본 대학생들의 박정희 예찬(禮讚)
그들은 박정희의 가장 큰 장점을 청렴함이라고 했다.
日학생들 "박정희를 부정하면 마치 민주화 세대인 것처럼 자부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도 민주주의를 모르는 나라"
장진성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 음식점에서 어제 밤 일본 대학생들과 장시간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물론 내가 아니라 한국말을 잘하는 그들 때문에 우리는 서로 교감할 수 있었다. 국제외교정치를 전공하는 그들은 연세대와 고려대 유학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이 해안포를 발사하면 그 소리가 한국에서보다 더 크게 들리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그만큼 안정된 질서와 기나긴 평화에 체질화 된 일본인들이어선지 분단 상황이면서도 드라마틱한 이웃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컸다.
나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랍게도 일제히 박정희! 라고 합창했다. 한국 대학생들에게서도 잘 듣지 못한 말을 일본 대학생들에게 듣는 순간 전율 같은 감동이 솟구쳤다. 아니 그들은 나보다도 박정희 대통령을 더 존경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우선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장점을 청렴함이라고 했다. 미리 준비하고 서거한 것도 아닌데, 총에 맞아 급사했는데도 자기와 가족을 위한 비자금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에 일본이 3억 달러를 원조했을 때도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 대통령들 같은 경우 그 돈을 횡령하여 혼자만 부자가 된 반면, 박대통령은 고스란히 국민을 위한 경제개발에 돌렸다는 것이다.
나는 어설픈 상식으로 김일성은 세습권력을 위한 독재를 했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위한 독재를 했다며 분단시대의 두 長期(장기) 체제를 비교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선 개발독재라는 표현도 일본 대학생들은 개발독선(獨善)이라고 했다. 박대통령이 비록 밀어붙였지만 결국은 옳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그때 고속도로를 반대했던 이른바 민주투사들이란 사람들이 과연 역사 앞에 진실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전기를 아끼느라 청와대 에어컨을 끄고 파리채를 들었던 사실이며 서거 당시 착용했던 낡은 벨트와 구두, 화장실 변기에 사용했던 벽돌까지 그들은 박대통령 일화를 참으로 많이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었는가 물었더니 박대통령을 연구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조갑제닷컴'에서 출판한 박정희전기를 모두 읽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우리 한국 대학생들 중 13권에 이르는 그 방대한 전기를 끝까지 읽은 학생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 하고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 덕에 살면서도 그 위업을 경시하는 한국의 현대사를 편향된 일방적 민주주의라고 규정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솔직한 역사인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국은 민주화의 역사만을 정당화한다고 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한강에는 그 상징물이 없는 나라이다.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이 바로 역사정립이고 후대의 예의가 아니겠냐며 한국은 일본의 과거를 자꾸 문제 삼는데 우선 저들의 현재부터 바로 세우라고 비판했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 같은 인물이 먼 옛날이 아니라 우리 부모세대에 일본을 구원했다면 자기들은 우리의 가까운 역사로 자부심을 가지겠지만 한국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며 매우 이상해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있을 당시 한국 대학생들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논쟁했던 이야기를 했다.
한국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일 뿐이고 왜 독재를 하게 됐는지, 그 결과가 과연 비참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도, 분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마치 그들의 주장은 논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고의 형식과 틀에 의존한 교과서 같았다. 박정희를 부정하면 마치 민주화 세대인 것처럼 자부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도 민주주의를 모르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광우병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웃음으로 비판했다. 이념이나 국민건강문제에 대한 우려를 떠나 시위자들의 사회적응 심리부터가 잘 못됐다는 것이다. 일본은 어디 가나 스미마셍으로 통한다. 남에게 불편을 줄 때는 물론 부를 때도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다. 그래서 미안하지 않기 위해 거리에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공동장소에서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하며 자기 집 앞은 깨끗이 청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잦은 시위들을 보면 남들에게 불편을 끼쳐서라도 자기들의 뜻을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잘못된 국민정서의 결정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용인되는 사회. 아니 법치에 도전해도 된다는 시민의식이 바로 한국의 대표적인 후진성이라고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일본의 한류열풍에 대한 이야기로 즐겁게 술잔을 나누었다.
나는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할 줄 아는 일본 대학생들을 위해 오늘 밥값은 내가 내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더치페이가 민주주의라며 각자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감사함을 무엇으로든 표현하고 싶어 2차 노래방 값은 그들 몰래 내가 계산했다.
받은 글입니다.
공감가는 부분도 아닌 부분도 있지만, 정치색을 떠나서 생각해 볼만한 분이셨다고 생각되어 올립니다.
그들은 박정희의 가장 큰 장점을 청렴함이라고 했다.
日학생들 "박정희를 부정하면 마치 민주화 세대인 것처럼 자부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도 민주주의를 모르는 나라"
장진성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 음식점에서 어제 밤 일본 대학생들과 장시간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물론 내가 아니라 한국말을 잘하는 그들 때문에 우리는 서로 교감할 수 있었다. 국제외교정치를 전공하는 그들은 연세대와 고려대 유학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이 해안포를 발사하면 그 소리가 한국에서보다 더 크게 들리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그만큼 안정된 질서와 기나긴 평화에 체질화 된 일본인들이어선지 분단 상황이면서도 드라마틱한 이웃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컸다.
나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랍게도 일제히 박정희! 라고 합창했다. 한국 대학생들에게서도 잘 듣지 못한 말을 일본 대학생들에게 듣는 순간 전율 같은 감동이 솟구쳤다. 아니 그들은 나보다도 박정희 대통령을 더 존경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우선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장점을 청렴함이라고 했다. 미리 준비하고 서거한 것도 아닌데, 총에 맞아 급사했는데도 자기와 가족을 위한 비자금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에 일본이 3억 달러를 원조했을 때도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 대통령들 같은 경우 그 돈을 횡령하여 혼자만 부자가 된 반면, 박대통령은 고스란히 국민을 위한 경제개발에 돌렸다는 것이다.
나는 어설픈 상식으로 김일성은 세습권력을 위한 독재를 했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위한 독재를 했다며 분단시대의 두 長期(장기) 체제를 비교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선 개발독재라는 표현도 일본 대학생들은 개발독선(獨善)이라고 했다. 박대통령이 비록 밀어붙였지만 결국은 옳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그때 고속도로를 반대했던 이른바 민주투사들이란 사람들이 과연 역사 앞에 진실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전기를 아끼느라 청와대 에어컨을 끄고 파리채를 들었던 사실이며 서거 당시 착용했던 낡은 벨트와 구두, 화장실 변기에 사용했던 벽돌까지 그들은 박대통령 일화를 참으로 많이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었는가 물었더니 박대통령을 연구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조갑제닷컴'에서 출판한 박정희전기를 모두 읽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우리 한국 대학생들 중 13권에 이르는 그 방대한 전기를 끝까지 읽은 학생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 하고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 덕에 살면서도 그 위업을 경시하는 한국의 현대사를 편향된 일방적 민주주의라고 규정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솔직한 역사인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국은 민주화의 역사만을 정당화한다고 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한강에는 그 상징물이 없는 나라이다.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이 바로 역사정립이고 후대의 예의가 아니겠냐며 한국은 일본의 과거를 자꾸 문제 삼는데 우선 저들의 현재부터 바로 세우라고 비판했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 같은 인물이 먼 옛날이 아니라 우리 부모세대에 일본을 구원했다면 자기들은 우리의 가까운 역사로 자부심을 가지겠지만 한국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며 매우 이상해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있을 당시 한국 대학생들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논쟁했던 이야기를 했다.
한국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일 뿐이고 왜 독재를 하게 됐는지, 그 결과가 과연 비참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도, 분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마치 그들의 주장은 논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고의 형식과 틀에 의존한 교과서 같았다. 박정희를 부정하면 마치 민주화 세대인 것처럼 자부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도 민주주의를 모르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광우병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웃음으로 비판했다. 이념이나 국민건강문제에 대한 우려를 떠나 시위자들의 사회적응 심리부터가 잘 못됐다는 것이다. 일본은 어디 가나 스미마셍으로 통한다. 남에게 불편을 줄 때는 물론 부를 때도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다. 그래서 미안하지 않기 위해 거리에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공동장소에서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하며 자기 집 앞은 깨끗이 청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잦은 시위들을 보면 남들에게 불편을 끼쳐서라도 자기들의 뜻을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잘못된 국민정서의 결정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용인되는 사회. 아니 법치에 도전해도 된다는 시민의식이 바로 한국의 대표적인 후진성이라고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일본의 한류열풍에 대한 이야기로 즐겁게 술잔을 나누었다.
나는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할 줄 아는 일본 대학생들을 위해 오늘 밥값은 내가 내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더치페이가 민주주의라며 각자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감사함을 무엇으로든 표현하고 싶어 2차 노래방 값은 그들 몰래 내가 계산했다.
받은 글입니다.
공감가는 부분도 아닌 부분도 있지만, 정치색을 떠나서 생각해 볼만한 분이셨다고 생각되어 올립니다.
雲甫 김기창 화백의 감동 강연
♣ 雲甫 김기창 화백의 감동 강연 ♣
마이크 잡은 雲甫 김기창 화백의 외마디 "벼씨 새끼트라!" (병신 새끼들아!)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설립된 청송교도소는 교화대상에서 제외한 다른 교도소의 고질적인 전과자나 흉악한 범죄자들만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그 시절 ‘청송교도소’라면 ‘빠삐용 요새’라는 별칭처럼 ‘날짐승마저도 피해 간다.’는 무시무시한 퍼런 기들이 날아다녔던 곳이었다.
죄질이 흉악한 범죄인들 200여명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마음먹기에 따라 행했던 자들로, 그들에게서 뿜어 나오는 드센 기에 보통 사람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70이 넘은 운보 화백은 그 칼날이 시퍼런 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의 특유한 대화체로 ‘병신 새끼들아!’는 욕으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운보 화백이 청송교도소에 온 배경에는 삼중스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시절 삼중스님은 사형수를 교화하기 위하여 청송교도소를 드나들었다.
하루는 교도소장이 삼중스님에게 부탁이 있다면서 ‘삼중스님이 운보 화백님을 잘 아시지요?’ 하는 말을 던졌다. 삼중스님은 운보 화백과는 안면이 없었던 시절이라 자신에게 운보 화백을 묻는 이유를 궁금해 하였다.
“다른 교도소에서도 재소자들의 마음을 교화하기 쉽지 않은데, 이 청송에서는 더욱 더 힘이 듭니다. 좋은 미술품을 재소자들에게 보여서 그들에게 편안한 마음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교도소장의 말에 감동한 삼중스님은 ‘내가 한번 알아보겠다.’는 답변으로 전혀 만난 적이 없던 화백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청송교도소의 벽에 운보 화백의 그림을 걸고자 한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려는 깊은 뜻에서 그림을 기부 받고 싶다.”
무슨 일이든 좋은 마음에서 덤비면 뭐든지 이루어진다는 소신만이 삼중스님의 장기 중의 특기였다. 뜻밖에도 운보 화백의 아들이 삼중스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버님이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답니다. 자신이 직접 청송교도소로 그림을 가지고 가고 싶답니다.”
이 답변 또한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 시절 운보 화백의 혈기와 명성은 그가 지닌 최정상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라서 그런지 운보 화백은 그림 10점을 하루 동안에 그리는 정열이 있었다.
재소자들을 위해서 운보 자신의 귀중한 하루를 보내려는 그의 깊은 속뜻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유명한 화백들이 기부한 그림 50점을 기념하는 행사는 청송교도소 앞마당에서 열렸다. 행사에 참가하려는 삼중스님은 운보 화백을 처음으로 만나 같이 동행하여 내려갔다.
간단한 식순에 맞추어 삼중스님은 재소자들 200여명이 도열한 앞마당에서 금강경을 법문했다. 삼중스님이 법문을 끝낸 후 자리에 앉으려하자 운보 자신도 강연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행사 식순에 없던 갑작스런 그의 강연의사에 진행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분위기에도 ‘나또 하마띠 타고 시타(나도 한마디 하고 싶다)’ 는 의사표현을 강하게 했다.
운보 화백의 모습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말을 재소자에게 들려주어야 한다고 때를 쓰는 듯 했다. 그래서 삼중스님은 주변의 양해를 구하고 연단에 그의 손을 잡고 올라갔다.
첫 마디부터 심상치 않았다.
“벼씨 새끼트라! (병신 새끼들아!)”
이 첫 마디에 연단 옆에 서 있던 삼중스님은 화들짝 놀랐다. 청송교도소 200여명이 있는 이곳에서 욕을 했다. 청송교도소로 내려오는 동안 차안에서 화백의 특이한 대화체에 어느 정도 익숙했던지라 삼중스님은 욕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들을 수 있었다.
파랗게 놀란 눈으로 앞마당 재소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잠시 출렁이더니 조금 지나자 조용해졌다. 화백의 말은 이어졌다.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그렇지만 나는 몸은 병신이지만 정신만은 건강하다. 그런데 당신들은 몸은 건강하나 정신은 병신이다. 그래서 내가 욕을 한 것이다. 나같이 몸이 병신이지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나는 타고난 재주나 조건을 믿지 않았다. 내 재주를 갈고 닦아서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왜 건강한 몸으로 이런 무시무시한 교도소에 들어와서 이 지옥에서 죽을 고생들을 하느냐?” 며 재소자들을 몰아 세웠다.
만약 운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욕을 했다면 아마도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후문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운보 화백의 말에는 진실로 그들을 아끼는 마음을 느꼈던지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더니 숙연하게 듣고 있었다.
참 이 기막힌 장면에 모두가 많이도 놀랬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받은 진실한 선물은 재소자, 교도관, 그리고 참가한 사람들 모두에게 커다란 마음의 출렁임을 주었다.
그 날 운보 화백은 법무부장관의 공로패를 받았다. 공식 행사를 끝낸 후 청송교도소를 나오려하자 운보 화백의 고집은 이어졌다.
운보 자신과 같은 처지인 벙어리 재소자를 만나 보고자 하는데 문제는 장소였다. 청각장애 재소자들이 먹고 자는 감방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만나야겠다는 황소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청각장애자가 수감된 감방’이라는 장소를 지적하는 그의 고집에 주변사람들의 애간장을 끓게 하였다. 아무리 말려보아도 소용이 없자, 삼중스님은 법무부 고위 관리에게 법무처의 특별 허락을 부탁했다. 드디어 운보 화백은 청각장애 재소자의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삼중스님도 그를 따라 처음으로 감방안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감방 안에 들어 선 운보 화백은 벙어리 재소자를 꽉 껴안더니 볼을 비비면서 울었어요. ‘병신된 것도 서러운데 왜 이런 생지옥에서 이리 서럽게 살고 있느냐?’ 울음 속에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어요. 볼을 서로 비비면서 우는 통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저절로 나왔어요. 통곡으로 변해 서로 엉켜진 몸 타래를 풀어내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진정한 우애의 정을 내비치는 운보 화백의 모습에 삼중스님과 교도관들은 녹아 내렸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는 삼중스님을 따라 운보 화백도 저 먼 제주교도소까지 다니면서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더 귀중하게 사용했다.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끈끈한 정을 보이는 운보 화백에게 확연히 상이한 모습도 있었다. 그것은 권력과 재력에 휘둘리지 않는 그의 곧은 기질은 소문으로도 대단하였다.
한 번은 법무부 장관의 청탁에 의해 운보 자신의 그림 한 점을 법무연수원에 기부받기를 원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의 작품 한 점이 시중에서 3천만 원에 거래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는 기부를 원했던 법무부장관에게 작품가 5천만 원에 판매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던졌다.
삼중스님이 곁에서 지켜 본 운보 화백의 끈끈한 정은 그의 어머니에게 나왔다고 했다.
“운보 화백은 참 효자였어요. 청주에 있는 화실에서 내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를 모셨어요. 그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자신의 화실 창문에서 바라본 어머니 묘지의 정경이라고 했습니다.”
운보 화백이 청송교도소 강연장에서 내지른 외마디. ‘벼씨 새끼트라!’ 는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외마디 욕을 내지르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받은 글입니다.
마이크 잡은 雲甫 김기창 화백의 외마디 "벼씨 새끼트라!" (병신 새끼들아!)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설립된 청송교도소는 교화대상에서 제외한 다른 교도소의 고질적인 전과자나 흉악한 범죄자들만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그 시절 ‘청송교도소’라면 ‘빠삐용 요새’라는 별칭처럼 ‘날짐승마저도 피해 간다.’는 무시무시한 퍼런 기들이 날아다녔던 곳이었다.
죄질이 흉악한 범죄인들 200여명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마음먹기에 따라 행했던 자들로, 그들에게서 뿜어 나오는 드센 기에 보통 사람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70이 넘은 운보 화백은 그 칼날이 시퍼런 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의 특유한 대화체로 ‘병신 새끼들아!’는 욕으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운보 화백이 청송교도소에 온 배경에는 삼중스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시절 삼중스님은 사형수를 교화하기 위하여 청송교도소를 드나들었다.
하루는 교도소장이 삼중스님에게 부탁이 있다면서 ‘삼중스님이 운보 화백님을 잘 아시지요?’ 하는 말을 던졌다. 삼중스님은 운보 화백과는 안면이 없었던 시절이라 자신에게 운보 화백을 묻는 이유를 궁금해 하였다.
“다른 교도소에서도 재소자들의 마음을 교화하기 쉽지 않은데, 이 청송에서는 더욱 더 힘이 듭니다. 좋은 미술품을 재소자들에게 보여서 그들에게 편안한 마음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교도소장의 말에 감동한 삼중스님은 ‘내가 한번 알아보겠다.’는 답변으로 전혀 만난 적이 없던 화백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청송교도소의 벽에 운보 화백의 그림을 걸고자 한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려는 깊은 뜻에서 그림을 기부 받고 싶다.”
무슨 일이든 좋은 마음에서 덤비면 뭐든지 이루어진다는 소신만이 삼중스님의 장기 중의 특기였다. 뜻밖에도 운보 화백의 아들이 삼중스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버님이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답니다. 자신이 직접 청송교도소로 그림을 가지고 가고 싶답니다.”
이 답변 또한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 시절 운보 화백의 혈기와 명성은 그가 지닌 최정상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라서 그런지 운보 화백은 그림 10점을 하루 동안에 그리는 정열이 있었다.
재소자들을 위해서 운보 자신의 귀중한 하루를 보내려는 그의 깊은 속뜻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유명한 화백들이 기부한 그림 50점을 기념하는 행사는 청송교도소 앞마당에서 열렸다. 행사에 참가하려는 삼중스님은 운보 화백을 처음으로 만나 같이 동행하여 내려갔다.
간단한 식순에 맞추어 삼중스님은 재소자들 200여명이 도열한 앞마당에서 금강경을 법문했다. 삼중스님이 법문을 끝낸 후 자리에 앉으려하자 운보 자신도 강연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행사 식순에 없던 갑작스런 그의 강연의사에 진행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분위기에도 ‘나또 하마띠 타고 시타(나도 한마디 하고 싶다)’ 는 의사표현을 강하게 했다.
운보 화백의 모습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말을 재소자에게 들려주어야 한다고 때를 쓰는 듯 했다. 그래서 삼중스님은 주변의 양해를 구하고 연단에 그의 손을 잡고 올라갔다.
첫 마디부터 심상치 않았다.
“벼씨 새끼트라! (병신 새끼들아!)”
이 첫 마디에 연단 옆에 서 있던 삼중스님은 화들짝 놀랐다. 청송교도소 200여명이 있는 이곳에서 욕을 했다. 청송교도소로 내려오는 동안 차안에서 화백의 특이한 대화체에 어느 정도 익숙했던지라 삼중스님은 욕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들을 수 있었다.
파랗게 놀란 눈으로 앞마당 재소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잠시 출렁이더니 조금 지나자 조용해졌다. 화백의 말은 이어졌다.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그렇지만 나는 몸은 병신이지만 정신만은 건강하다. 그런데 당신들은 몸은 건강하나 정신은 병신이다. 그래서 내가 욕을 한 것이다. 나같이 몸이 병신이지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나는 타고난 재주나 조건을 믿지 않았다. 내 재주를 갈고 닦아서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왜 건강한 몸으로 이런 무시무시한 교도소에 들어와서 이 지옥에서 죽을 고생들을 하느냐?” 며 재소자들을 몰아 세웠다.
만약 운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욕을 했다면 아마도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후문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운보 화백의 말에는 진실로 그들을 아끼는 마음을 느꼈던지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더니 숙연하게 듣고 있었다.
참 이 기막힌 장면에 모두가 많이도 놀랬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받은 진실한 선물은 재소자, 교도관, 그리고 참가한 사람들 모두에게 커다란 마음의 출렁임을 주었다.
그 날 운보 화백은 법무부장관의 공로패를 받았다. 공식 행사를 끝낸 후 청송교도소를 나오려하자 운보 화백의 고집은 이어졌다.
운보 자신과 같은 처지인 벙어리 재소자를 만나 보고자 하는데 문제는 장소였다. 청각장애 재소자들이 먹고 자는 감방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만나야겠다는 황소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청각장애자가 수감된 감방’이라는 장소를 지적하는 그의 고집에 주변사람들의 애간장을 끓게 하였다. 아무리 말려보아도 소용이 없자, 삼중스님은 법무부 고위 관리에게 법무처의 특별 허락을 부탁했다. 드디어 운보 화백은 청각장애 재소자의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삼중스님도 그를 따라 처음으로 감방안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감방 안에 들어 선 운보 화백은 벙어리 재소자를 꽉 껴안더니 볼을 비비면서 울었어요. ‘병신된 것도 서러운데 왜 이런 생지옥에서 이리 서럽게 살고 있느냐?’ 울음 속에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어요. 볼을 서로 비비면서 우는 통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저절로 나왔어요. 통곡으로 변해 서로 엉켜진 몸 타래를 풀어내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진정한 우애의 정을 내비치는 운보 화백의 모습에 삼중스님과 교도관들은 녹아 내렸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는 삼중스님을 따라 운보 화백도 저 먼 제주교도소까지 다니면서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더 귀중하게 사용했다.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끈끈한 정을 보이는 운보 화백에게 확연히 상이한 모습도 있었다. 그것은 권력과 재력에 휘둘리지 않는 그의 곧은 기질은 소문으로도 대단하였다.
한 번은 법무부 장관의 청탁에 의해 운보 자신의 그림 한 점을 법무연수원에 기부받기를 원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의 작품 한 점이 시중에서 3천만 원에 거래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는 기부를 원했던 법무부장관에게 작품가 5천만 원에 판매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던졌다.
삼중스님이 곁에서 지켜 본 운보 화백의 끈끈한 정은 그의 어머니에게 나왔다고 했다.
“운보 화백은 참 효자였어요. 청주에 있는 화실에서 내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를 모셨어요. 그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자신의 화실 창문에서 바라본 어머니 묘지의 정경이라고 했습니다.”
운보 화백이 청송교도소 강연장에서 내지른 외마디. ‘벼씨 새끼트라!’ 는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외마디 욕을 내지르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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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건강 7계명
물 건강 7계명
단 하루도 물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제대로 마시는 사람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물을 건강하게 마시는 방법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냉장고에 붙여두고 온 가족이 실천하거나, 다이어리에 끼워 넣고 다니면 좋은 물 건강 7계명.
1. 하루에 반드시 7~8컵 이상을 공복에 마신다.
2. 가능한 실온에 두고 마신다.
3. 받아놓은 물은 밀폐해서 24시간 안에 마신다.
4. 미네랄이 함유된 물은 가능한 한 끓이지 말고 생수로 마신다.
5. 마시는 물은 알칼리성, 씻는 물은 약산성이 바람직하다.
6. 음주 후엔 반드시 2컵 이상의 찬물을 마신다.
7. 물은 천천히 마신다.
-여성조선 이덕진 기자, 자료제공: 뉴온, 미국 하버드 의대 '건강 생활 요령'-
노화와 함께 갈증을 느끼게 하는 관도 따라서 퇴화 한답니다. 따라서 물 마시는 것도 습관화해두시면 노년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며 항상 건강과 더불어 촉촉 피부도 함께 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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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도 물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제대로 마시는 사람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물을 건강하게 마시는 방법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냉장고에 붙여두고 온 가족이 실천하거나, 다이어리에 끼워 넣고 다니면 좋은 물 건강 7계명.
1. 하루에 반드시 7~8컵 이상을 공복에 마신다.
2. 가능한 실온에 두고 마신다.
3. 받아놓은 물은 밀폐해서 24시간 안에 마신다.
4. 미네랄이 함유된 물은 가능한 한 끓이지 말고 생수로 마신다.
5. 마시는 물은 알칼리성, 씻는 물은 약산성이 바람직하다.
6. 음주 후엔 반드시 2컵 이상의 찬물을 마신다.
7. 물은 천천히 마신다.
-여성조선 이덕진 기자, 자료제공: 뉴온, 미국 하버드 의대 '건강 생활 요령'-
노화와 함께 갈증을 느끼게 하는 관도 따라서 퇴화 한답니다. 따라서 물 마시는 것도 습관화해두시면 노년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며 항상 건강과 더불어 촉촉 피부도 함께 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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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물 건강 생활법
♡♤ 24시간 물 건강 생활법 ♤♡
- 하루에 7잔 이상 마신다! -
물은 어떤 물을 어떻게 마시는지가 중요하다. 하루에 7~8잔 마시라고 하는데 언제 마시면 가장 좋은지? 하루의 생활을 따라가며 구성해본다.
◆ AM 07:00 기상 직후 물 한 잔
기상 직후 물을 한 잔 마시면 밤새 축적된 노폐물을 용해시켜 몸 밖으로 배출시키므로 체내의 신진대사를 촉진시키고 원활한 혈액순환을 도우며 신장의 부담을 덜어준다. 더욱이 배설 기능이 강화되어 변비 예방이나 치료는 물론 하루의 컨디션을 가볍게 시작할 수 있다.
◆ AM 08:00 아침식사 전 물 한 잔
식사 전에 물을 한 잔 마시면 위장의 컨디션을 조절하며, 과식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 AM 10:00 근무중 물 한 잔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다 지치거나 피로해질 때 찬물 한 컵을 마시면 피로도 풀리고 지루함을 덜어준다. 또한 물은 흡연 욕구를 자제시키므로 담배를 많이 피우는 흡연가들의 건강 예방에도 좋다.
◆ PM 12:00 점심식사 전 물 한 잔
점심식사 직전에 물을 한 잔 마시면 과식을 막아준다. 특히 외식을 많이 하는 직장인의 점심은 식당의 음식이 전반적으로 짜거나 매운데, 이때 중간 중간에 물을 조금씩 마셔주면 체내 염분 조절이 이루어지므로 성인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 PM 03:00 공복에 물 한 잔
오후 3시경은 군것질 욕구가 생기거나 흡연 욕구가 강해지는 시간. 이때 군것질이나 담배 대신 물을 한 잔 마시면 군것질 욕구도 사라지고 흡연 욕구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 PM 07:00 저녁식사와 함께 물 한 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식하게 되는 저녁식사 중간 중간에 물을 조금씩 마셔주면 체내 염분 조절도 이루어지므로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되며 과식을 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 PM 10:00 잠자리 전 물 한 잔
잠자기 전 미네랄 풍부한 물을 마시면 다음날 훨씬 가벼운 몸 상태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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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에 7잔 이상 마신다! -
물은 어떤 물을 어떻게 마시는지가 중요하다. 하루에 7~8잔 마시라고 하는데 언제 마시면 가장 좋은지? 하루의 생활을 따라가며 구성해본다.
◆ AM 07:00 기상 직후 물 한 잔
기상 직후 물을 한 잔 마시면 밤새 축적된 노폐물을 용해시켜 몸 밖으로 배출시키므로 체내의 신진대사를 촉진시키고 원활한 혈액순환을 도우며 신장의 부담을 덜어준다. 더욱이 배설 기능이 강화되어 변비 예방이나 치료는 물론 하루의 컨디션을 가볍게 시작할 수 있다.
◆ AM 08:00 아침식사 전 물 한 잔
식사 전에 물을 한 잔 마시면 위장의 컨디션을 조절하며, 과식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 AM 10:00 근무중 물 한 잔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다 지치거나 피로해질 때 찬물 한 컵을 마시면 피로도 풀리고 지루함을 덜어준다. 또한 물은 흡연 욕구를 자제시키므로 담배를 많이 피우는 흡연가들의 건강 예방에도 좋다.
◆ PM 12:00 점심식사 전 물 한 잔
점심식사 직전에 물을 한 잔 마시면 과식을 막아준다. 특히 외식을 많이 하는 직장인의 점심은 식당의 음식이 전반적으로 짜거나 매운데, 이때 중간 중간에 물을 조금씩 마셔주면 체내 염분 조절이 이루어지므로 성인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 PM 03:00 공복에 물 한 잔
오후 3시경은 군것질 욕구가 생기거나 흡연 욕구가 강해지는 시간. 이때 군것질이나 담배 대신 물을 한 잔 마시면 군것질 욕구도 사라지고 흡연 욕구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 PM 07:00 저녁식사와 함께 물 한 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식하게 되는 저녁식사 중간 중간에 물을 조금씩 마셔주면 체내 염분 조절도 이루어지므로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되며 과식을 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 PM 10:00 잠자리 전 물 한 잔
잠자기 전 미네랄 풍부한 물을 마시면 다음날 훨씬 가벼운 몸 상태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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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의 `청어 이야기'
토인비의 `청어 이야기'
`세계적 역사가 토인비박사가 즐겨 하던 이야기이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 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먼 거리의 런던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운반하는가의 문제였다. 어부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 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 있었다. 그러나 꼭 한 어부의 청어만은 싱싱하게 산채로 있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동료 어부들이 그 이유를 물어 보았으나 그 어부는 좀채로 그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마침내 동료들의 강요에 못이긴 어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청어를 넣은 통에다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
그러자 동료 어부들이 놀라 물었다.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 않습니까?”
어부는 말했다. “네,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놈은 청어를 두세 마리밖에 못 잡아먹지요. 하지만 그 통 안에 있는 수백 마리의 청어들은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살기 위해 열심히 헤엄치고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 길 후에 런던에 도착해 봐도 청어들은 여전히 살아 싱싱합니다.”
메기로부터 살아나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청어들을 건강하게 살아있게 한 것이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의 촉진제가 된다고들 하지요. 또 삶에 있어.. 풀리지 않는 숙제를 갖고 있는 이들의 생의 애착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더 강하다고도 합니다. 어쩌면, 삶에 있어서의 고난은 그것이 아픔과 고통일지라도 애써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생존의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받은 글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메기론으로 더 많이들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원래는 토인비가 했던 이야기인가 봅니다.
`세계적 역사가 토인비박사가 즐겨 하던 이야기이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 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먼 거리의 런던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운반하는가의 문제였다. 어부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 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 있었다. 그러나 꼭 한 어부의 청어만은 싱싱하게 산채로 있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동료 어부들이 그 이유를 물어 보았으나 그 어부는 좀채로 그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마침내 동료들의 강요에 못이긴 어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청어를 넣은 통에다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
그러자 동료 어부들이 놀라 물었다.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 않습니까?”
어부는 말했다. “네,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놈은 청어를 두세 마리밖에 못 잡아먹지요. 하지만 그 통 안에 있는 수백 마리의 청어들은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살기 위해 열심히 헤엄치고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 길 후에 런던에 도착해 봐도 청어들은 여전히 살아 싱싱합니다.”
메기로부터 살아나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청어들을 건강하게 살아있게 한 것이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의 촉진제가 된다고들 하지요. 또 삶에 있어.. 풀리지 않는 숙제를 갖고 있는 이들의 생의 애착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더 강하다고도 합니다. 어쩌면, 삶에 있어서의 고난은 그것이 아픔과 고통일지라도 애써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생존의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받은 글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메기론으로 더 많이들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원래는 토인비가 했던 이야기인가 봅니다.
역전의 기회는 이때다!
역전의 기회는 이때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기나 역경을 뒤집어 보자는 의미에서 ‘뒤집기, 전화위복’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이 어느 날 TV에 나와서 인터뷰 중이었습니다. 앵커의 다양한 질문 중에 음식에 관한 질문이 있었는데 부시 전 대통령이 “나는 브로콜리를 싫어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발언을 들은 시청자들이 브로콜리를 잘 안 먹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이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국민들이 대통령의 발언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브로콜리 소비가 갑자기 줄어들자 브로콜리 협회에서는 대책반을 구성해서 ‘이 난국을 어떻게 타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브로콜리 소비를 장려하는 아이디어를 공모 했습니다.
그 중에 채택된 한 아이디어가 브로콜리를 대형트럭에 싣고 주변에 브로콜리를 집중하는 조명을 켜고 이것을 공개적으로 부시대통령에게 선물하는 컨셉이었습니다.
“대통령님, 이 채소는 대통령님을 직접 뽑아 준 국민들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채소입니다. 이 채소는 건강에 아주 유익합니다.”라고 강조하면서 브로콜리가 가지고 있는 장점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께 선물 하는 것을 홍보 전략으로 세워서 홍보를 했더니 이것이 소비자들이 더 많이 브로콜리를 찾는 계기가 돼서 더 많은 소비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위기가 옵니다. 위기를 기회로 뒤집는 기회가 필요합니다.
일본의 복서 중에 고구치 마사유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머리카락이 없었습니다. 대중 앞에서 뛰다 보니 외모를 전혀 무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민을 했던 마시유키는 가발을 쓰고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복서 경기에서 가발은 금지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가발을 쓰고 권투를 하던 마사유키는 머리에 펀치를 빗맞아 그만 가발이 벗겨지고 말았습니다.
이 게임이 문제가 됐습니다. 가발도 반칙이고, 마사유키가 대머리라는 사실이 일본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사유키는 이로 인해 게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고 대머리로 인해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전국의 유명한 가발 회사, 유명한 발모제 회사에서 광고모델로 나와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마시유키는 많은 광고료를 벌 수 있었고, 실제로 발모제를 발랐더니 머리가 자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발모제 바른 머리로 권투시합에 나가 11연승의 승리를 거뒀습니다.
받은 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기나 역경을 뒤집어 보자는 의미에서 ‘뒤집기, 전화위복’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이 어느 날 TV에 나와서 인터뷰 중이었습니다. 앵커의 다양한 질문 중에 음식에 관한 질문이 있었는데 부시 전 대통령이 “나는 브로콜리를 싫어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발언을 들은 시청자들이 브로콜리를 잘 안 먹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이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국민들이 대통령의 발언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브로콜리 소비가 갑자기 줄어들자 브로콜리 협회에서는 대책반을 구성해서 ‘이 난국을 어떻게 타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브로콜리 소비를 장려하는 아이디어를 공모 했습니다.
그 중에 채택된 한 아이디어가 브로콜리를 대형트럭에 싣고 주변에 브로콜리를 집중하는 조명을 켜고 이것을 공개적으로 부시대통령에게 선물하는 컨셉이었습니다.
“대통령님, 이 채소는 대통령님을 직접 뽑아 준 국민들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채소입니다. 이 채소는 건강에 아주 유익합니다.”라고 강조하면서 브로콜리가 가지고 있는 장점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께 선물 하는 것을 홍보 전략으로 세워서 홍보를 했더니 이것이 소비자들이 더 많이 브로콜리를 찾는 계기가 돼서 더 많은 소비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위기가 옵니다. 위기를 기회로 뒤집는 기회가 필요합니다.
일본의 복서 중에 고구치 마사유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머리카락이 없었습니다. 대중 앞에서 뛰다 보니 외모를 전혀 무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민을 했던 마시유키는 가발을 쓰고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복서 경기에서 가발은 금지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가발을 쓰고 권투를 하던 마사유키는 머리에 펀치를 빗맞아 그만 가발이 벗겨지고 말았습니다.
이 게임이 문제가 됐습니다. 가발도 반칙이고, 마사유키가 대머리라는 사실이 일본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사유키는 이로 인해 게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고 대머리로 인해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전국의 유명한 가발 회사, 유명한 발모제 회사에서 광고모델로 나와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마시유키는 많은 광고료를 벌 수 있었고, 실제로 발모제를 발랐더니 머리가 자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발모제 바른 머리로 권투시합에 나가 11연승의 승리를 거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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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원 신부님
미화원 신부님
"아저씨!"
"… …"
"아저씨! 잠깐만요."
11월30일 영동고속도로 ○○휴게소. 한 중년 부인이 승용차 창문을 반쯤 내리고 부근에서 빗자루질하는 미화원 ㅂ씨를 불렀다.
ㅂ씨는 부인이 부르는 '아저씨'가 자신이란 걸 뒤늦게 알고 고개를 돌렸다.
"이거(일회용 종이컵) 어디에 버려요?"
(그걸 몰라서 묻나. 쓰레기통까지 가기가 그렇게 귀찮은가?)
"이리 주세요."
ㅂ씨는 휴게소 미화원으로 일한 지 이 날로 꼭 한 달째다. 그런데도 '아저씨'란 호칭이 낯설다. 지난 27년 동안 '신부님'이란 소리만 듣고 살았기 때문이다. 안식년을 이용해 휴게소 미화원으로 취직한 청소부가 된 신부님' ㅂ신부.
그는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12시간 동안 휴게소 광장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며 빗자루질을 한다. 그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주변에 한 명도 없다. 기자의 '기습'에 깜짝 놀란 그는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일인데"하며 사람들 눈을 피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사람들 사는 게 점점 힘들어 보여서 삶의 현장으로 나와 본 거예요. 난 소신학교 출신이라 돈 벌어본 적도 없고, 세상 물정에도 어두워요. 신자들이 어떻게 벌어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집 장만하고, 교무금을 내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소위 '빽'을 경험했다. 농공단지에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갔는데 나이가 많아 받아주는 데가없었다. 아는 사람이 힘을 써줘서 겨우 휴게소 미화원 자리를 얻기는 했지만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란 걸 피부로 느꼈다.
그는 출근 첫날 빗자루를 내던지고 그만두려고 했다. 화장실 구역을 배정받았는데 허리 펴 볼 틈도 없이 바쁘고 힘이 들었다. 대소변 묻은 변기 닦아내고, 발자국 난 바닥 걸레질하고, 담배 한대 피우고 돌아오면 또 엉망이고….
그래도 일이 고달픈 건 견딜만 했다. 사람들 멸시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커피 자판기 앞에서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했다. 무엇을 잘못 눌렀는지 커피가 걸쭉하게 나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상태였다. ㅂ신부는 휴게소 직원으로서 자신의 동전을 다시 넣고 제대로 된 커피를 뽑아주었다. 그랬더니 그 여성이 "고마워요. 저건(걸쭉한 커피) 아저씨 드시면 되겠네"라며 돌아서는 게 아닌가.
"제가 그때 청소복이 아니라 신사복 차림이었다면 그 여성이 어떤 인사를 했을까요?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되죠."
ㅂ신부는 "그러고 보면 지난 27년 동안 사제복 덕분에 분에 넘치는 인사와 대접을 받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눈물젖은(?) 호두과자도 먹어 보았다. 아침식사를 거르고 나왔는데 허기가 져서 도저히 빗자루질을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호두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트럭 뒤에 쪼그려앉아 몰래 먹었다. 손님들 앞에서 음식물 섭취와 흡연을 금지하는 근무규정 때문이다.
그의 한달 세전 월급은 120만원. 그는 "하루 12시간씩 청소하고 한달에 120만원 받으면 많이 받는거냐, 적게 받는거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또 "언젠가 신자가 사다준 반팔 티셔츠에 10만원 넘는 가격표가 붙어 있던데…"라며 120만원의 가치를 따져보았다. 이번엔 기자가 "신부님이 평범한 50대 중반 가장이라면 그 월급으로 생활할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다. "내 씀씀이에 맞추면 도저히 계산을 못하겠네요. 그 수입으로는 평범한 가장이 아니라 쪼들리는 가장밖에 안 될 것 같은데."
그는 "신자들은 그런데도 헌금에 교무금에 건축기금까지 낸다"며 "이제 신자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강론대에서 '사랑'을 입버릇처럼 얘기했는데 청소부로 일해보니까 휴지는 휴지통에, 꽁초는 재떨이에 버리는 게 사랑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누군가가 그걸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평범한 일입니다. 또 과시할 것도 없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랄 필요도 없죠. 시기질투도 없습니다. 그게 참사랑입니다."
그는 "신자들이 허리굽혀 하는 인사만 받던 신부가 온종일 사람들 앞에서 허리 굽혀 휴지를 주우려니까 여간 힘든 게 아니다"며 웃었다. 그는 "퇴근하면 배고파서 허겁지겁 저녁식사하고 곧바로 곯아 떨어진다"며 "본당에 돌아가면 그처럼 피곤하게 한 주일을 보내고 주일미사에 온 신자들에게 평화와 휴식 같은 강론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날은 그의 마지막 근무일이다. 애초에 한 달 계획으로 들어왔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의 한달 체험을 사치라고 말했다.
"난 오늘 여기 그만 두면 안도의 한숨을 쉬겠죠. 하지만 이곳이 생계 터전인 진짜 미화원이라면 절망의 한숨을 쉴 것입니다. 다시 일자리를 잡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도 '빽'써서 들어왔는데. 그리고 가족들 생계는 당장 어떡하고. 그래서 사치스러운 체험이라는 거예요."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 일터로 뛰어갔다. 한시간 가량 자리를 비운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 같다. 미화반장한테 한소리 들었을지도 모른다.
쓸고 닦고 줍고… 몸을 깊숙이 숙인 채 고속도로 휴게소를 청소하는 ㅂ신부. 그에게 빗자루질은 사제생활 27년 동안 알게 모르게 젖어든 타성에서 벗어나고,마음의 때를 씻어내려는 기도인지도 모른다.
받은 글입니다.
"아저씨!"
"… …"
"아저씨! 잠깐만요."
11월30일 영동고속도로 ○○휴게소. 한 중년 부인이 승용차 창문을 반쯤 내리고 부근에서 빗자루질하는 미화원 ㅂ씨를 불렀다.
ㅂ씨는 부인이 부르는 '아저씨'가 자신이란 걸 뒤늦게 알고 고개를 돌렸다.
"이거(일회용 종이컵) 어디에 버려요?"
(그걸 몰라서 묻나. 쓰레기통까지 가기가 그렇게 귀찮은가?)
"이리 주세요."
ㅂ씨는 휴게소 미화원으로 일한 지 이 날로 꼭 한 달째다. 그런데도 '아저씨'란 호칭이 낯설다. 지난 27년 동안 '신부님'이란 소리만 듣고 살았기 때문이다. 안식년을 이용해 휴게소 미화원으로 취직한 청소부가 된 신부님' ㅂ신부.
그는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12시간 동안 휴게소 광장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며 빗자루질을 한다. 그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주변에 한 명도 없다. 기자의 '기습'에 깜짝 놀란 그는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일인데"하며 사람들 눈을 피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사람들 사는 게 점점 힘들어 보여서 삶의 현장으로 나와 본 거예요. 난 소신학교 출신이라 돈 벌어본 적도 없고, 세상 물정에도 어두워요. 신자들이 어떻게 벌어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집 장만하고, 교무금을 내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소위 '빽'을 경험했다. 농공단지에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갔는데 나이가 많아 받아주는 데가없었다. 아는 사람이 힘을 써줘서 겨우 휴게소 미화원 자리를 얻기는 했지만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란 걸 피부로 느꼈다.
그는 출근 첫날 빗자루를 내던지고 그만두려고 했다. 화장실 구역을 배정받았는데 허리 펴 볼 틈도 없이 바쁘고 힘이 들었다. 대소변 묻은 변기 닦아내고, 발자국 난 바닥 걸레질하고, 담배 한대 피우고 돌아오면 또 엉망이고….
그래도 일이 고달픈 건 견딜만 했다. 사람들 멸시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커피 자판기 앞에서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했다. 무엇을 잘못 눌렀는지 커피가 걸쭉하게 나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상태였다. ㅂ신부는 휴게소 직원으로서 자신의 동전을 다시 넣고 제대로 된 커피를 뽑아주었다. 그랬더니 그 여성이 "고마워요. 저건(걸쭉한 커피) 아저씨 드시면 되겠네"라며 돌아서는 게 아닌가.
"제가 그때 청소복이 아니라 신사복 차림이었다면 그 여성이 어떤 인사를 했을까요?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되죠."
ㅂ신부는 "그러고 보면 지난 27년 동안 사제복 덕분에 분에 넘치는 인사와 대접을 받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눈물젖은(?) 호두과자도 먹어 보았다. 아침식사를 거르고 나왔는데 허기가 져서 도저히 빗자루질을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호두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트럭 뒤에 쪼그려앉아 몰래 먹었다. 손님들 앞에서 음식물 섭취와 흡연을 금지하는 근무규정 때문이다.
그의 한달 세전 월급은 120만원. 그는 "하루 12시간씩 청소하고 한달에 120만원 받으면 많이 받는거냐, 적게 받는거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또 "언젠가 신자가 사다준 반팔 티셔츠에 10만원 넘는 가격표가 붙어 있던데…"라며 120만원의 가치를 따져보았다. 이번엔 기자가 "신부님이 평범한 50대 중반 가장이라면 그 월급으로 생활할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다. "내 씀씀이에 맞추면 도저히 계산을 못하겠네요. 그 수입으로는 평범한 가장이 아니라 쪼들리는 가장밖에 안 될 것 같은데."
그는 "신자들은 그런데도 헌금에 교무금에 건축기금까지 낸다"며 "이제 신자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강론대에서 '사랑'을 입버릇처럼 얘기했는데 청소부로 일해보니까 휴지는 휴지통에, 꽁초는 재떨이에 버리는 게 사랑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누군가가 그걸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평범한 일입니다. 또 과시할 것도 없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랄 필요도 없죠. 시기질투도 없습니다. 그게 참사랑입니다."
그는 "신자들이 허리굽혀 하는 인사만 받던 신부가 온종일 사람들 앞에서 허리 굽혀 휴지를 주우려니까 여간 힘든 게 아니다"며 웃었다. 그는 "퇴근하면 배고파서 허겁지겁 저녁식사하고 곧바로 곯아 떨어진다"며 "본당에 돌아가면 그처럼 피곤하게 한 주일을 보내고 주일미사에 온 신자들에게 평화와 휴식 같은 강론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날은 그의 마지막 근무일이다. 애초에 한 달 계획으로 들어왔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의 한달 체험을 사치라고 말했다.
"난 오늘 여기 그만 두면 안도의 한숨을 쉬겠죠. 하지만 이곳이 생계 터전인 진짜 미화원이라면 절망의 한숨을 쉴 것입니다. 다시 일자리를 잡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도 '빽'써서 들어왔는데. 그리고 가족들 생계는 당장 어떡하고. 그래서 사치스러운 체험이라는 거예요."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 일터로 뛰어갔다. 한시간 가량 자리를 비운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 같다. 미화반장한테 한소리 들었을지도 모른다.
쓸고 닦고 줍고… 몸을 깊숙이 숙인 채 고속도로 휴게소를 청소하는 ㅂ신부. 그에게 빗자루질은 사제생활 27년 동안 알게 모르게 젖어든 타성에서 벗어나고,마음의 때를 씻어내려는 기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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