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晉州城)에서 ①

진주성(晉州城)에서

지난 일요일에 동창 자녀의 결혼식 참석차 진주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서둘렀는지라 진주에 도착하니 오전 열한시경이었는데 예식시간까지는 두시간 넘게 여유가 있어서 진주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진주에 들리면 꼭 가보는, 촉석루가 자리하고 있는 진주성은 수도없이 가 보았지만 진주시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접근성이 좋아서 쉽게 들릴 수 있으므로 또 가게된다.

晉州城하면 보통 촉석루와 논개(論介)를 떠 올리지만 사실은 임진왜란때 왜적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진주대첩'이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진주성의 본 모습임을 알아야 할것 같다.


김시민 장군과 진주성

사적 제118호인 진주성은 진주의 상징이다. 둘레 1,320미터인 이 성에는 진주의 역사와 긍지가 살아 숨쉬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최초로 대대적 승리를 거둔 곳이 바로 이곳 진주성이다. 그리고 그 주역이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었다. 이때 왜적을 크게 물리친 진주성 대첩은 충무공의 한산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이라고 한다. ‘대첩(大捷)’은 크게 이긴 전투를 일컫는 것이다.


청사에 길이 남을 역사를 이루었으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느낌이 없지 않다. 진주의 긍지를 태동시킨 진주성 대첩의 주역들이 ‘의기 논개’의 명성에 밀려 흔적조차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사실 진주성 입구에서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논개 시비’이다. 또 진주 성문을 지나 곧장 촉석루에 들어서도 의기사, 의암 등 역시 논개 흔적뿐이다. 이러다 보니 진주성을 찾은 사람들은 논개만 보고 돌아간다. 그리고 진주성 하면 너나없이 ‘촉석루’ ‘논개’만을 떠올린다.


한산도에 가서 이충무공을 생각하지 않고, 행주산성에 가서 권율 장군을 떠올리지 않고 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진주에 와서는 김시민 장군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91년 진주판관으로 부임하고 부터이다.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선조25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당시 진주목사 이경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초유사김성일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 대행에 임명된 장군은 병기를 수리하고 성지를 구축하는 한편 수성군을 모집하여 진주성을 사수하고자 했다. 장군은 모집된 수성군에게 맹훈련을 시키고 병기와 자재를 정비하고 양곡을 비치하였다.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호남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만약 이곳이 무너지면 왜적은 바로 호남 지역을휩쓸게 되는 상항이었다.


또한 장군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에 따라 거창으로 나가 왜적을 크게무찔러 이 공로로 1592년 7월 26일 진주목사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왜군장수 평소태를 생포하여 의주의 조정에 보내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으며, 고성, 창원까지 진격하여 왜적을 무찌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왜적은 김해, 고성, 창원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연패하자 경상우도의 조선군 주력부대가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이를 함락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왜적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등원랑, 평조신 등을 주축으로 부산, 동래, 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여명을 동원하여 1592년 10월 5일 진주성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가 거느린 군사 3,700명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100명 등 도합 3,800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예병이라기 보다는 새로 모집한 장정들이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민들의 필사적인 단결과 곽재우•최강•이달 등 각처 의병들의 열렬한 성원에 고무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심한 후 화살하나 탄환 한발이라도 낭비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0월 5일 아침부터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주무기로 3개 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시민 장군은 적군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고자 일정한 거리에 올 때까지 대적하지 않고 성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한편, 직접 성내를 순회하면서 임전태세를 점검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자신도 병사와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솔선수범 하였다. 이같은 장군의 헌신적 노력에 감복한 군사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무릎쓰고 싸우게 되었다.


받은 글과 사진입니다.

'오프라 윈프리'의 感謝일기

'오프라 윈프리'의 感謝일기

하루에 다섯가지 感謝 제목을 기록..
인생의 방향 깨닫게 해준 에너지...

지독하게 가난한 미혼모에게 태어나 어머니의 품이 아닌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하였고,
14세에 출산과 동시에 미혼모, 아이는 태어난지 2주만에 죽었고,
그 충격에 가출하여 마약복용으로 하루하루를 지옥같이 살았으며,
살고자 하는 의욕이 전혀없는 107kg의 몸매를 가졌던 여인....

하지만 '오프라 윈프리'는 지금 눈부신 존재로 우뚝 섰다.
전 세계의 1억 4000만 시청자를 웃고 울리는 토크쇼의 여왕으로,
영화배우로, 자산 6억$의 부자로,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으로..
인생에서 가장 얻고싶다는 인기, 존경, 돈을 모두 가진 여성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중에 한 사람인 그녀,
하지만 밥먹는 일 외에 그녀가 하루도 빼먹지 않은 일이 있다.
날마다 감사의 일기를 쓰는 일이다.
그녀는 하루동안 일어난 일중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찾아 기록한다.
감사의 내용은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이다.

-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점심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얄미운 짓을 한 동료에게 화내지 않았던 저의 참을성에 감사합니다.
- 좋은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써준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감사의 일기를 통해 두 가지를 배웠다고 합니다.
첫째는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둘째는 삶의 촛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를...
감사의 습관은 오늘의 오프라 윈프리를 만든 에너지가 된 셈입니다.


받은 글입니다.

어느 주부의 감동글

어느 주부의 감동글

안녕하세요? 33살 먹은 주부에요..
32살때 시집와서 남편이랑 분가해서 살았구요
남편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혼자계신
아버님 모시자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느누가 좋다고 할수있겠어요..
그일로 남편이랑 많이 싸웠어요..
위에 형님도 있으신데 왜 우리가 모시냐고..
아주버님이 대기업 다니셔서 형편이 정말 좋아요...

그일로 남편과 싸우고 볶고 거의 매일을 싸웠어요..
하루는 남편이 술먹고 울면서 말을 하더군요...
뭐든 다른거는 하자는 대로 다 할테니까
제발 이번만은 부탁좀 들어 달라구..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적 엄청 개구쟁이였데요..
매일 사고 치고 다니고 해서 아버님께서
매번 뒷 수습하로 다니셨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때 골목에서 놀고 있는데
지나 가던 트럭에 (큰트럭 말고 중간크기트럭)받힐뻔
한걸 아버님이 보시고 남편 대신 부딪히셨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도 오른쪽 어깨를 잘못 쓰신데요..
그리고 아버님 하시던 일이 노가다 였는데
남편이 군 제대 하고도 26살때쯤 까지 놀고 먹었더랍니다..

아버님이 남편을 늦게 낳으셔서
지금 아버님 연세가 68세되세요..
남편은 33살이구요..
60세 넘으셨을 때도 노가다 (막노동) 하시면서
가족들 먹여 살리고 고생만 하셨다네요...

노가다를 오래 하면 시멘트 독이라고 하나...
하여튼 그거 때문에 손도 쩍쩍 갈라 지셔서
겨울만 되면 많이 아파 하신다고 하더라구요..
평생 모아 오신 재산으로 마련하셨던
조그만한 집도 아주버님이랑 남편 결혼 할때
집 장만 해 주신다고 팔으시고
지금 전세 사신다고 하구요...

그런데 어머님 까지 돌아 가시고 혼자 계신거 보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자주 난다고 하더라구요...
저희요...전 살림하고 남편 혼자 버는데
한달에 150정도 벌어 와요..

근데 그걸로 아버님 오시면 아무래도
반찬도 신경써야 하고 여러가지로 힘들거 같더라구요..
그때 임신도 해서 애가 3개월인데...
형님은 절대 못 모신다고 못 박으셨고
아주버님도 그럴 생각이 없다라고
남편이 말을 하더라구요..

어떡 합니까...저렇게 까지 남편이 말 하는데...
그래서 넉달전 부터 모시기로 하고
아버님 모셔 왔습니다..

첨에 아버님 오지 않으시려고
자꾸 거절 하시 더라구요..
늙은이 가 봐야 짐만 되고 눈치 보인 다면서요..

남편이 우겨서 모셔 왔습니다..
모셔온 첫날부터
여러 모로 정말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
매번 반찬 신경써서 정성껏 차려 드리면...

그걸 드시면서도 엄청 미안해 하십니다...
가끔씩 고기반찬이나 맛있는 거 해 드리면
안 먹고 두셨다가 남편 오면 먹이더라구요...
그리고 저 먹으라고 일부로 드시지도 않구요..

거기다가 하루는 장보고 집에 왔는데
걸레질을 하고 있으신거 보고 놀라서
걸레 뺐으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다 청소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식사 하시면 바로 들고
가셔서 설겆이도 하십니다...

아버님께 하지 말라고 몇번 말씀 드리고
뺏어도 보지만 그게 편하시답니다...아버님은...
제가 왜 모르겠어요...
이못난 며느리 눈치 보이시니
그렇게 행동하시는거 압니다...저도...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남편이 몰래 아버님 용돈을 드려도
그거 안 쓰고 모아 두었다가
제 용돈하라고 주십니다...

어제는 정말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
아버님께 죄인이라도 된듯해서 눈물이
왈칵 나오는데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한달전 쯤 부터 아버님께서
아침에 나가시면 저녁때 쯤 들어 오시더라구요..

어디 놀러라도 가시는 거 같아서
용돈을 드려도 받으시지도 않고 웃으면서
다녀 올게 하시면서 매일 나가셨습니다..

어제 아래층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더라구요..

"오다가 이집 할아버지 봤는데
유모차에 박스 실어서 가던데~ "

이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네..그래요..
아버님 아들집에 살면서 돈 한푼
못버시는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불편한 몸 이끌고 하루 하루
그렇게 박스 주우 시면서 돈 버셨더라구요..
그 이야기 듣고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아버님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 다녀도
안 보이시더라구요...
너무 죄송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상황 말하니
남편도 아무 말이 없더군요..
저녁 5시조금 넘어서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들어 왔어요..

남편도 마음이 정말 안 좋은지
아버님 찾으로 나간다고 하곤 바로 나갔어요...
제가 바보였어요...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몇일 전 부터 아버님께서 저 먹으라고
봉지에 들려 주시던 과일과 과자들이
아버님께서 어떻게 일해서 사 오신 것인지를...
못난 며느리 눈치 안 보셔도 되는데
그게 불편 하셨던지 아들집 오셔서도
편하게 못 지내 시고 눈치만 보시 다가
불편하신 몸 이끌고 그렇게 일하고 있으셨다니...

친정에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 가셨는데...
돌아가신 아빠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 가셨는데...
그날 따라 아버님 웃으실때 얼굴에
많은 주름과 손목에서
갈라진 피부가 자꾸 생각나면서
너무 죄송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올때까지 엉엉 울고있었습니다..

남편나가고 한시간 좀 넘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 오더라구요...
아버님 오시면서도 제 눈치 보시면서
뒤에 끌고 오던 유모차를 숨기시는 모습이
왜 그리 마음이 아플까요...
오히려 죄송해야 할건 저인데요...

왜 그렇게 아버님의 그런 모습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요...
달려 가서 아버님께 죄송 하다며
손 꼭잡고 또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매일 나 때문에
내가 미안 하다면서
제 얼굴을 보면서 말씀 하시는 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아버님 손 첨 만져 봤지만요...

심하게 갈라지신 손등과 굳은살 베인
손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방안에 모시고 가서도 죄송하다며
그렇게 펑펑 울었습니다...

아버님 식사 챙겨 드리려고 부엌에 와서도
눈물이 왜그리 그치지 않던지...
남편이 아버님께 그런일 하지 말라고..
제가 더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니까

그런일 하지 말라고 아버님께 확답을 받아 낸후
세명 모여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먹는 데도 아버님 손을 보면서
자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오늘 남편이 노는 날이라
아버님 모시고 시내 나가서
날이 좀 쌀쌀 해져서
아버님 잠바 하나랑 신발을 샀습니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던 아버님께
제가 말씀 드렸어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아버님 눈치 보여서 힘 들어요!!"
이렇게 말씀 드렸더니 고맙다고
하시며서 받으시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아버님 심심 하실 까봐
케이블TV도 신청 했구요...
아버님께서 스포츠를 좋아 하시는 데
오늘 야구방송이랑 낚시 방송 보시면서
너무 즐거워 하시더라구요...

조용히 다가가서 아버님
어깨를 만져 드리는데...
보기 보다 정말 왜소 하시더라구요...
제가 꽉 잡아도 부서 질것만 같은
그런 아버님의 어깨...

지금까지 고생만 하시고..
자식들 뒷 바라지 하시느라
평생 헌신 하시며서 살아 오셨던
아버님의 그런 자취들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또 아팠네요..

남편한테 말했어요..
저 평생 아버님 정말 친아버지
처럼 생각하고 모신 다구요...
비록 지금은 아버님께서 불편해 하시지만..

언젠가는 친딸 처럼 생각 하시면서
대해 주실 때까지 정말 잘 할거라구요..
마지막으로 아버님...
저 눈치 안 보셔도 되요...
제가 그렇게 나쁜 며느리 아니 잖아요 ㅠㅠ

아버님의 힘드신 희생이 없으셨다면
지금의 남편도 없잖아요..
그랬다면 지금의 저와 뱃속의
사랑스러운 손자도 없을거에요..

저 아버님 싫어 하지 않고 정말 사랑해요 아버님...
그러니 항상 건강 하시고 오래 오래 사셔야 되요..
그리고 두번 다시 그렇게 일 안 하셔 도되요...
저 허리띠 쫄라 매고
알뜰하게 살께요...

사랑해요 아버님 ...........


받은 글입니다.

마음 놓고 살아본 적 있어요?

"마음 놓고 살아본 적 있어요?"

"며칠,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걱정 없이, 몸 안에 티끌만한 긴장도 없이, 정말로 마음 푹 놓고 지내본 적이 있냐구요!"

노는 동안에도 이 시간이 끝나면
다시 일을 해야 한다는 걱정에 더 치열하게 놀았다.
잠을 잘 때에도 내일 아침엔 말짱해져야 하기 때문에
비장하게 램 수면에 빠져 들었다.
'마음 놓고 살아보기' 너무나
탐나는 물건 아닌가!

- 곽세라의《인생에 대한 예의》중에서 -


'주말'이라는 달콤한 시간속에도 항상 월요일을 걱정하며 전전긍긍하느라 마음껏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늘 마음 졸이며 긴장하고 살았던 나의 몸과 마음, 주말, 휴식시간만이라도 우리 마음놓고 조금 쉬었다 가면 어떨까요?


받은 글입니다.

카프리의 하얀 절벽을 배경으로 한 절경을 뒤로하고 ⑤



얼굴색도 모두 구릿빛 남부의 강한 햇살을 닮은듯~ 자유로운 그들의 삶처럼... 예쁜항구도시 소렌토에서




기차는 아니고 경전철 같은걸 타고 소렌토에서 나폴리까지 오는데 경치가 정말 아름다운데 더위에 지친 나는 전철이 폼베이를 지나는 데도 무력하게 지나쳤다. 바다가 계속 보이고 오렌지 나무들과 포도나무들이 보이고 멀리 산 위에는 올리브나무도 보이는데.내눈에는 아무것두 들어오지않는다


나폴리역에 도착하니 에어컨이 있는 로마발 유로스타가 우릴 구해준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그대를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돌아오라 쏘렌토로 - 파파로티


받은 글과 사진입니다.

인생의 주춧돌

인생의 주춧돌

축구선수 박지성은
발과 생각의 훈련을 같이 했기 때문에
항상 공보다도 먼저 자리를 잡고
공을 기다리는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공의 흐름을 읽고
항상 공의 길목을 차단하는 것으로
지능적인 플레이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 이철한의《생각의 선택》중에서 -


축구는 물론 씨름과 같은 몸으로 하는 운동도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사실은 '두뇌 게임'이라고 합니다. 운동뿐 아니라 삶의 핵심도 두뇌, 곧 '생각'에 있습니다. 오늘 나의 생각이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춧돌이 됩니다.


받은 글입니다.

카프리의 하얀 절벽을 배경으로 한 절경을 뒤로하고 ④






이곳이 유명한 것은 그 아름다운 풍광도 풍광이지만 뭐니뭐니해도 그 유명한 나폴리 민요 "돌아오라 소렌토 (Torna a Sorriento)"입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소리엔토"라고 부르는 소렌토입니다.



소렌토는 절벽 위에 도시가 있다. 그 절벽 어디쯤 서서 '돌아오라 소렌토로' 노래를 불렀을까요? 항구에서 시내로 가는 좁은 길이 참 예쁘고. 시내길은 좁고 복잡한 편이다.


쏘렌토를 그냥 지나가기는 너무 아쉬웠다.



받은 사진입니다.

카프리의 하얀 절벽을 배경으로 한 절경을 뒤로하고 ③

쏘렌토는 고급스런 휴양지가 아니었지만 이상스레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소렌토의 항구. 깎아지른듯 서있는 절벽과 그 위의 마을이 묘한 느낌을 준다.


소렌토 항구에 도착~ 오솔레미오가 어디선가 들릴듯한 작은 항구도시 소렌토... 조용하고, 바람이 잔잔한 소렌토는 이태리 남부도시는 소박한 정취가 풍겨난다.



받은 글과 사진입니다. 사진을 보니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느낌이 드네요.

카프리의 하얀 절벽을 배경으로 한 절경을 뒤로하고 ②


"돌아오라 쏘렌토로("Come back to Sorrento)"와 "오! 솔레미오(O sole mio)"로 유명한 쏘렌토

나폴리만의 색조와 친숙한 소음,








항구에서 바라본 절벽과 그 위에 도시를 건설한 것이 방어의 목적이었다고 친다면 굳이 길까지 절벽을 깎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소렌토의 항구. 깎아지른듯 서있는 절벽과 그 위의 마을이 묘한 느낌을 준다.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

큰일 났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나라가 '핀란드화'의 가파른 비탈길을 빠른 속도로 굴러 떨어지고 있습니다.

1. 핀란드가 걸어온 길

핀란드는 작은 나라지만 백성들은 성깔 있는 사람들입니다. 백여 년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다가 1917년 러시아가 공산혁명에 휩싸여 어수선한 틈을 타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공산 소련이 자리 잡고 다시 독립을 위협하자 1939년 용감히 전쟁을 벌였습니다. 물론 졌지요. 간신히 독립을 유지했지만 많은 권리를 내주었습니다.

1941년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켜 소련을 침공하자 함께 쳐들어갔습니다. 지난날의 불평등조약을 깨칠 양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유 서구를 등지고 나치 편에 선 셈이 되었습니다. 1944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단독으로 소련에 항복했습니다.

민주 정체로 독립을 유지하는 대가로 12%의 국토를 할양하고, 앞으로 외교 국방 등 일체의 대외 문제처리에 있어서는 소련의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하고 강화조약을 맺었습니다.

나치 협력 때문에 서구 우방을 잃고 고립하게 된 핀란드는 완전히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을 위시한 모든 정부 요직 인선은 소련 대사관의 의중에 따르게 되고, 이를 어겼다 싶으면 즉각 경제 재제를 가하여 옴짝달싹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연히 친소파가 판치게 되고, 언론, 출판도 반소적인 것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어느덧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는' "자기 검열"의 관행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핀란드화(Finlandization)"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2. 깊어가는 한국 핀란드화의 수렁

21세기 들어 중국이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습니다. 지난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하고 물러날 때까지 중국은 '백년의 국치'를 겪었습니다.

1842년 아편전쟁으로 서구 열강에 무릎을 꿇어 홍콩을 할양한 것을 스타트로,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여 대만을 내주고 조선에서 밀려나고, 1931년 일본의 침공으로 만주를 빼앗기고 뒤이어 중일전쟁으로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가, 1945년 2차대전이 끝나 겨우 국권이 회복될 때까지의 백년간입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3국시대 천년을 빼고는, 청일전쟁 이후부터 냉전이 종식되어 한중 국교가 재개된 1992년까지의 백년이 한국이 중국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유일한 기간이었습니다.

핀란드에서도 보듯, 대국과 이웃하는 것은 불행한 일에 속합니다. G2의 경제 대국이면서 이미 한국의 제1무역상대국이 된 중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 그런 富에 걸맞은 문화 수준에 와 있지 못하고, 더구나 지난 백년의 국치에 한이 맺혀, 사리에 맞지 않게 힘을 과시하려 합니다. 광적 민족주의 성향입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위한 성화 봉송 도중 중국인들이 한국시민과 경찰에 폭행을 가했습니다. 남의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그것도 우발이 아닌 정부의 지시로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또 작년 한국 대통령의 국빈 방문 때 중국의 정부 대변인이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한미 군사동맹은 역사적 유물이며, 냉전시대의 군사동맹으로 현대의 안보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렇게 한국의 국가 원수를 모욕함으로써 자국의 위상을 과시하려 했습니다.

또 툭하면 한국 상품에 제동을 걸어 한국 정부를 길들이려 합니다. 북한은 이미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없어 식량과 기름을 얻어 쓰는 대가로 북한 내 사업 이권을 대폭 양도하고, 백두산 등 국경선 책정에 양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수시로 들리는 중국대사의 망언이나 위 여러 사례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나 언론에서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미국이나 일본 측에서 일어났을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것은 이미 한국의 핀란드화가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명백한 징후입니다.

3. 후손을 위한 우리의 할 일

중국이 저리도 커지고 우리와 이웃이라는 조건으로 볼 때 우리가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현실성 없는 가정으로 밖에 안 보입니다. 그 영향권 내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주권에 대한 침해를 최소로 줄일 것인가를 강구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일 것입니다.

첫째는 장기적 목표로, 북한이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중국 대책을 포함해 모든 일의 근본적 해결책일 것입니다.

둘째는 당장의 목표로, 한국 내 북한지지 좌파세력을 척결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핀란드가 그랬듯이 동맹국 우방이 없어지면 강국에 일방적으로 당하게 마련입니다. 중국이 한미동맹 해체를 요구하는 것도 그 점을 노린 것입니다. 한미동맹이 깨지는 날이 중국이 한국을 경멸하게 되는 날입니다. 중국에 대해 우리와 같은 입장에 있는 일본과도 중국문제에 대해서는 협력해 나가야 합니다.

넷째는 나라의「國格」을 지켜야 합니다. 모든 외국인에 대한 사법권의 정당한 행사는 대국과의 거래에 있어서도 나라의 마지막 보루가 됩니다. 중국인의 난동에 대한 비굴한 자세는 스스로 노예 되기를 자청한 도덕적 타락입니다. 과거 대만과의 신의 없는 단교가 오히려 중국 당국의 경멸을 샀던 것과 같은 처사입니다.

이상은 卜鉅一 씨의 저서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 중 몇 대목입니다. 이 책을 읽고 오늘에 우리가 처한 위태로운 처지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고이 자라고 있는 우리들의 어린 후손을 위해 지금 세대가 바짝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꼭 한번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중대사에 눈을 뜨게 해준 저자에게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성원 한국청소년도서재단 이사장
韓國의 Finland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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