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심(不動心)
마음의 선악보다 행위의 선악이 판별하기 쉽다
세상사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냉혹하고 냉정하며 진실한 마음도 없고, 거짓 행동을 일삼는 자가 오히려 사회에서 신뢰를 얻고 성공의 면류관을 쓴다. 그런가 하면 지극히 성실하고 성의가 있어 이른바 충실한 길을 가는 사람이 오히려 세상에 소외당하여 낙오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이 모순을 연구하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는 동기가 되는 그 뜻과 행동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뜻이 아무리 진실하고 충서의 길에 걸맞다 해도, 그 행동이 굼뜨고 둔하거나 혹은 경박하고 제멋대로라면 그 뜻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행위가 선의였다고 해도, 그 행동이 남에게 해가 된다면 선행이라 할 수 없다.
옛 소학독본에 ‘친절, 오히려 불친절이 되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다. 병아리가 부화하여 밖으로 나오려 하는데, 알껍데기에서 제대로 나오지 못해 애쓰는 것을 보고 친절한 아이가 껍데기를 벗겨주자 병아리가 그만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맹자'에도 이와 비슷한 예가 자주 등장한다. 문구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전달하는 의미는 잘 기억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상대를 도울 좋은 생각이 떠올라 그 집에 함부로 뛰어들다가 문을 부서뜨린다는 내용이다.
양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왕의 부엌에는 고깃덩어리가 그득하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의 얼굴에는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들판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나뒹굴고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고 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라고 대답했다.
맹자는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정치를 잘못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공손추가 맹자의 부동심과 고자의 부동심에 대해 묻자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자는 ‘말에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마음의 도움을 구하지 말라. 그 마음에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을 떄 기의 도움을 구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에 거스르는 것이 있더라도 감정을 발동시키지 말라는 말은 맞으나, 마음의 도움을 구하지 말라는 말은 옳지 않다. 우리의 마음은 기를 통솔하고, 기는 우리 몸에 가득 차 있는 힘이다. 마음이 가는 곳으로 기 또한 따라간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를 단단히 세우며 자신의 기를 함부로 발동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의지가 곧 마음의 근본이며, 기는 행위로 드러난 마음의 표출’이라는 뜻이다.
선의의 마음에서 충서의 길을 가고자 해도, 충동적으로 생기는 기로 인해 본심을 거스르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므로 그 본래의 마음을 가지고 나쁜 마음을 억눌러야 한다. 즉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부동심을 수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맹자 자신은 호연지기를 길러 이러한 수양에 도움이 되었지만, 보통 사람은 감정이 동요해 실수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맹자는 다음 같은 예로 설명하고 있다.
“송나라에 벼의 싹이 빨리 자라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싹을 뽑아 올렸던 사람이 있었다. 지친 모습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오늘은 몹시 고단하다. 내가 벼의 싹이 자라도록 도와주었다’고 했다. 그 아들이 놀라 달려가서 보니 싹은 이미 말라 죽었다.
벼를 잘 자라게 하려면 물과 비료를 조절하고, 때맞춰 잡초를 뽑아주어야 한다. 그런데 벼를 빨리 자라게 하려고 뽑아 올리는 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맹자의 부동심은 논외로 치더라도, 세상에는 이처럼 벼를 뽑아 올려 길게 만드는 행위가 적잖이 발생한다. 비록 벼를 빨리 자라게 하고 싶다는 선의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이것을 뽑아 올려 죽게 만드는 행위는 나쁘다. 이 의미를 확대 해석하면, 아무리 선량한 의도로 충서의 길에 합당하다 해도, 그 행동이 본래의 선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반대로, 본래의 의도가 다소 선하지 않았더라도 그 행위가 기민하고 충실하여 신뢰를 얻기에 충분하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것이다. ‘행위의 근본인 의도가 나빴더라도 행위가 올바르다’는 논리는 엄격히 말하면 어불성설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인이라 해도 속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남을 속일 수 있듯이, 사회에서도 사람의 마음의 선악보다는 그 행위의 선악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마음의 선악보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의 선악이 판별하기 쉬운 데다, 아무래도 행동이 민첩하고 선한 자가 쉽게 신뢰를 얻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전국을 순회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마을의 한 청년이 몸이 불편한 노모를 등에 업고 쇼군의 순시 행렬을 구경나왔다. 그 모습을 본 요시무네가 그 효자에게 상을 내렸다. 그런데 평소 불량한 행동을 일삼던 자가 이 소식을 듣고 상을 받고 싶은 욕심에 모르는 노인을 빌려 등에 업고 구경을 나갔다. 요시무네가 그에게도 상을 내리려 하자, 한 신하가 ‘상을 받기 위해 거짓 효행을 한 것’이라고 고했다. 그러자 요시무네는 ‘이런 흉내는 좋은 것’이라며 그 행위를 칭찬했다.
맹자의 가르침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서시 같은 절세미인도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코를 막고 지나갈 것이며, 아무리 추하게 생긴 사람일지라도 목욕재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면 하늘의 상제께 제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빼어난 미인도 겉이 더럽다면 옆에 오히려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음흉한 속마음을 가진 여자라도 하느적거리며 요염한 모습을 보이면 알게 모르게 흔들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의의 선악보다 행위의 선악이 쉽게 사람의 눈에 들기 쉬운 것이다.
세상에 아첨이 만연하고 충언이 귀에 거슬린다면,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폄하되어 밀려나기 쉽다. 그렇게 되면 “만약 이러한 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과연 옳은가, 그른가” 하는 탄식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세상에서는 교활한 사람이 오히려 성공하여 신용을 얻는 것이다.
출처 : 한손에는 논어를 한손에는 주판을
'ALPACO(alpha@alpaco.co.kr)'에서 받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