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지신(移木之信)
어느 날 대궐 담벼락에 이런 방이 붙었습니다.
'이 나무를 옮기는 사람에겐 백금을 주겠다.'
방을 보고도 나무를 옮기는 사람이 없자 상금은 천금,만금으로 늘어났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밑져야 본전이라 여기고 나무를 옮겼더니 약속대로 만금을 하사 받았습니다.
옛날 중국 진나라의 재상이었던 상앙이 백성들의 나라에 대한 불신을 없애려고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라의 정책이 백성들의 신뢰를 얻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뢰가 없이는 나라가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한자의 믿을 신(信)은 사람의 말을 가리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바위같은 믿음이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사색의향기님(culppy@culppy.org)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Reference
移木之信(이목지신)
Food, M. F. K. Fisher
Sharing food with another human being is an intimate act that should not be indulged in lightly.
- M. F. K. Fisher (1908-1992)
다른 인간과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은 가볍게 빠져서는 안되는 친밀한 행위이다.
- M. F. K. 피셔
[유머] 왜 자꾸 아몬드를 주세요?
왜 자꾸 아몬드를 주세요?
버스기사가 할머니 2분을 태우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다. 뒤에서 소곤소곤하던 할머니가 기사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기사가 돌아보자 할머니는 아몬드를 한 주먹 기사에게 줬다. 기사는 고마워하며 아몬드를 먹으며 운전을 했다.
몇분 후 또 다른 할머니가 아몬드를 건넸다.
기사 아저씨는 고마운 마음에 물었다.
"할머니, 아몬드를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왜 자꾸 아몬드를 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우린 이가 약해서 씹을 수가 없어" 라고 대답했다.
기사가 의아해하며 "그런데 왜 사셨어요?"하고 묻자
할머니 왈...
"그래서 초코릿만 빨아 먹고 아몬드는 자넬 주는 거지!"
버스기사가 할머니 2분을 태우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다. 뒤에서 소곤소곤하던 할머니가 기사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기사가 돌아보자 할머니는 아몬드를 한 주먹 기사에게 줬다. 기사는 고마워하며 아몬드를 먹으며 운전을 했다.
몇분 후 또 다른 할머니가 아몬드를 건넸다.
기사 아저씨는 고마운 마음에 물었다.
"할머니, 아몬드를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왜 자꾸 아몬드를 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우린 이가 약해서 씹을 수가 없어" 라고 대답했다.
기사가 의아해하며 "그런데 왜 사셨어요?"하고 묻자
할머니 왈...
"그래서 초코릿만 빨아 먹고 아몬드는 자넬 주는 거지!"
82세 늙은 아버지의 질문...?
82세 늙은 아버지의 질문...?
82 세의 노인이 52 세된 아들과 거실에 마주 앉아있었다. 그 때 우연히 까마귀 한마리가 창가의 나무에 날아와 앉았다. 노인이 아들에게 물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정하게 말했다.
“까마귀에요. 아버지”
아버지는 그런데 조금 후 다시 물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시 대답했다.
“까마귀라니까요.”
노인은 조금 뒤 또 물었다. 세 번째였다.
“저게 뭐냐?”
아들은 짜증이 났다.
“글쎄 까마귀라구요.”
아들의 음성엔 아버지가 느낄 만큼 분명하게 짜증이 섞여있었다.
그런데 조금 뒤 아버지는 다시 물었다. 네 번째였다.
“저게 뭐냐?”
아들은 그만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까마귀, 까마귀라구요. 그 말도 이해가 안돼요. 왜 자꾸만 같은 질문을 반복해 하세요?”
조금 뒤였다.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때가 묻고 찢어진 일기장을 들고 나왔다. 그 일기장을 펴서 아들에게 주며 읽어보라고 말했다.
아들은 일기장을 읽었다. 거기엔 자기가 세 살짜리 애기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오늘은 까마귀 한 마리가 창가에 날아와 앉았다. 어린 아들은 “저게 뭐야?”하고 물었다.
나는 까마귀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연거푸 23번을 똑 같이 물었다. 나는 귀여운 아들을 안아주며 끝까지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나는 까마귀라고 똑같은 대답을 23 번을 하면서도 즐거웠다. 아들이 새로운 것에 관심이 있다는 거에 대해 감사했고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는 게 즐거웠다.
어느날 0812 ^-동명-^
받은 글입니다.
많이 반성하게 하는 글이네요.
82 세의 노인이 52 세된 아들과 거실에 마주 앉아있었다. 그 때 우연히 까마귀 한마리가 창가의 나무에 날아와 앉았다. 노인이 아들에게 물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정하게 말했다.
“까마귀에요. 아버지”
아버지는 그런데 조금 후 다시 물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시 대답했다.
“까마귀라니까요.”
노인은 조금 뒤 또 물었다. 세 번째였다.
“저게 뭐냐?”
아들은 짜증이 났다.
“글쎄 까마귀라구요.”
아들의 음성엔 아버지가 느낄 만큼 분명하게 짜증이 섞여있었다.
그런데 조금 뒤 아버지는 다시 물었다. 네 번째였다.
“저게 뭐냐?”
아들은 그만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까마귀, 까마귀라구요. 그 말도 이해가 안돼요. 왜 자꾸만 같은 질문을 반복해 하세요?”
조금 뒤였다.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때가 묻고 찢어진 일기장을 들고 나왔다. 그 일기장을 펴서 아들에게 주며 읽어보라고 말했다.
아들은 일기장을 읽었다. 거기엔 자기가 세 살짜리 애기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오늘은 까마귀 한 마리가 창가에 날아와 앉았다. 어린 아들은 “저게 뭐야?”하고 물었다.
나는 까마귀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연거푸 23번을 똑 같이 물었다. 나는 귀여운 아들을 안아주며 끝까지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나는 까마귀라고 똑같은 대답을 23 번을 하면서도 즐거웠다. 아들이 새로운 것에 관심이 있다는 거에 대해 감사했고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는 게 즐거웠다.
어느날 0812 ^-동명-^
받은 글입니다.
많이 반성하게 하는 글이네요.
[유머] 졸업생
졸업생
졸업한지 근 40 여년이 다 된 여인이 오랜만에 즐거웠던 옛 추억을 회상하며 동창회에 참석하여 교정에 있는 화장실 앞을 지나는데 한 여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여자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무척이나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동창생이라고 생각하곤 그녀에게 달려갔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녀의 뒤통수를 치며 소리쳤다.
"야~이, 이년아! 정말 반갑구나, 도대체 이게 몇 년 만이니? 그사이에 너 많이 늙었구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몰라보겠는데?"
그 여자는 맞은 뒤통수가 아픈지 눈물을 찔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야 이년아! 나는 네 담임 선생이었어"
졸업한지 근 40 여년이 다 된 여인이 오랜만에 즐거웠던 옛 추억을 회상하며 동창회에 참석하여 교정에 있는 화장실 앞을 지나는데 한 여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여자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무척이나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동창생이라고 생각하곤 그녀에게 달려갔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녀의 뒤통수를 치며 소리쳤다.
"야~이, 이년아! 정말 반갑구나, 도대체 이게 몇 년 만이니? 그사이에 너 많이 늙었구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몰라보겠는데?"
그 여자는 맞은 뒤통수가 아픈지 눈물을 찔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야 이년아! 나는 네 담임 선생이었어"
마지막 인사
한동안 슬픔이 없었지,
기쁨이 없었던 것처럼.
내가 웃는 모습을 보여줄게.
너도 웃으며 나를 봐.
내가 우는 모습을 보인대도.
웃으며 안아 줘.
내가 다 하지 못한 이야기는
너의 가슴에 접어 줘.
나의 슬픈 모습이 떠오르면
빗속을 걸어줘.
- 김창완 '마지막 인사',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OST 중
작품으로 접근하게 되는 영화도 있고, 마음으로 접근하게 되는 영화도 있습니다.
후자의 영화죠.
1989년. 그리고 2015년.
그 시간동안 바뀐게 없는 현실이 슬프게 다가오는 노래입니다.
죽은 사람 극락 갔는지 지옥 갔는지 아는 법
◈★죽은 사람 극락 갔는지 지옥 갔는지 아는 법★◈
옛날 스님 한 분이 절에서 먼 마을로 탁발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양반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스님은 주인과 하인이 대화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마당쇠야"
"예, 주인마님"
"윗마을에 사는 박첨지가 어젯밤에 죽었다며?"
"예"
"그렇다면 박첨지가 지옥에 갔는지 극락으로 갔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예"
스님은 참으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평생을 염불과 참선수행을 하였지만 죽은 사람이 극락으로 가는지 지옥으로 가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데, 마을에 사는 영감이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당쇠가 돌아와 주인에게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지옥으로 갔습니다."
스님은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저 마당쇠가 죽은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신통력이라도 있는 것인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주인이 또 마당쇠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아랫마을 김진사도 죽었다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마당쇠는 한참 만에 돌아와 보고를 했습니다.
"김진사께서는 극락으로 갔습니다."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궁금함을 억누를 수 없었던 스님은 주인을 찾아가려고 일어섰고 때마침 주인이 밥상을 내오기에 물어보았습니다.
"처사님, 죽은 사람이 지옥에 갔는지 극락에 갔는지 도대체 어떻게 아시오?"
그러자 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 동네에 가면 금방 알 수 있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 나쁜 일만 일삼고 남을 못살게 굴었으니 지옥 갔을 거야'라고 말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옥 밖에 더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착하고 아까운 사람'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아쉬워하면 그 사람은 필경 극락에 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 옮긴 글
옛날 스님 한 분이 절에서 먼 마을로 탁발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양반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스님은 주인과 하인이 대화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마당쇠야"
"예, 주인마님"
"윗마을에 사는 박첨지가 어젯밤에 죽었다며?"
"예"
"그렇다면 박첨지가 지옥에 갔는지 극락으로 갔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예"
스님은 참으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평생을 염불과 참선수행을 하였지만 죽은 사람이 극락으로 가는지 지옥으로 가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데, 마을에 사는 영감이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당쇠가 돌아와 주인에게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지옥으로 갔습니다."
스님은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저 마당쇠가 죽은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신통력이라도 있는 것인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주인이 또 마당쇠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아랫마을 김진사도 죽었다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마당쇠는 한참 만에 돌아와 보고를 했습니다.
"김진사께서는 극락으로 갔습니다."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궁금함을 억누를 수 없었던 스님은 주인을 찾아가려고 일어섰고 때마침 주인이 밥상을 내오기에 물어보았습니다.
"처사님, 죽은 사람이 지옥에 갔는지 극락에 갔는지 도대체 어떻게 아시오?"
그러자 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 동네에 가면 금방 알 수 있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 나쁜 일만 일삼고 남을 못살게 굴었으니 지옥 갔을 거야'라고 말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옥 밖에 더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착하고 아까운 사람'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아쉬워하면 그 사람은 필경 극락에 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 옮긴 글
Food, Anthelme Brillat-Savarin
Tell me what you eat, and I will tell you what you are.
-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
당신이 먹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습니다.
- 앙텔므 브리야 샤바랭
아름다운 기도
아름다운 기도
- 송길원/교수 -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이 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에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 형이다. 새벽 시간에 일어나 설친다.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 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 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제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style)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향(香) 다 날아가고 뭐 땜에 비싼 돈 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확 부어버려. 맹물 부어줄까 그래.”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세마포와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안 되니까「붙여 놓은 것」아니냐 ”
너무 큰 충격이었다. 생각의 전환, 그렇게 나 자신을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게 있다 나의 은사(gift)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느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섬기라고」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ㆍㆍ
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제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쩍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 더러 뚜껑 좀 열어달라고 한다. 아내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變化).
그렇게 철들어진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하느님에게,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저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내가 변하는 것이 남을 변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게 하는 글입니다.
받은 글입니다.
- 송길원/교수 -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이 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에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 형이다. 새벽 시간에 일어나 설친다.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 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 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제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style)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향(香) 다 날아가고 뭐 땜에 비싼 돈 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확 부어버려. 맹물 부어줄까 그래.”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세마포와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안 되니까「붙여 놓은 것」아니냐 ”
너무 큰 충격이었다. 생각의 전환, 그렇게 나 자신을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게 있다 나의 은사(gift)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느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섬기라고」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ㆍㆍ
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제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쩍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 더러 뚜껑 좀 열어달라고 한다. 아내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變化).
그렇게 철들어진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하느님에게,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저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내가 변하는 것이 남을 변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게 하는 글입니다.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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