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권순익과 그의 아내 안진옥의 아름다운 삶 - 소요

화가 권순익과 그의 아내 안진옥의 아름다운 삶 - 소요

권순익은 어렵고 힘든 현실에서 다소나마 쉬어갈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 제목 ‘여의(如意)’나 ‘동락(同樂)’, ‘소요(逍遙)’가 이를 엿보게 해준다.

그는 아내와 함께 북한산 자락을 산책하다, 그저 묵묵히 계곡에 흐르는 물 사이로 왔다갔다 하는 작은 물고기를 구경하고, 나뭇가지 사이를 넘실거리는 바람을 즐긴다.

그윽한 기분으로 아내의 체취를 즐긴다. 이를 두고 그는 ‘소요’라 하였다.


나는 가난한 화가의 아내가 되는 길을 택했다. 사람들은 미친짓이라 했지만 나에겐 소중한 선택이었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나는 잉카와 아스테카에 대한 관심으로 아르헨티나 움사대학에서 박물학과 예술기획 및 관리학을 공부하는 등 그곳에서 15년간 지내면서 나이 40을 넘겼다.

결혼은 이미 나의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대학동창의 국제전화 한 통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인간문화재 같은’ 사람이 있으니 한번 소개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하루에 말 한마디 할 정도로 과묵하다는 점을 굳이 단점으로 강조했다.

3년 전 한겨울 눈이 소복히 내리던 날 그의 비닐하우스 작업실을 친구와 함께 불쑥 들렀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도시변두리에 위치한 허름한 곳이었지만 어슴푸레한 어둠과 흰 눈이 참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는 영하의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1시간 넘게 차가운 유약물에 손을 담가가며 흔들림 없이 작업에만 몰두했다. 말없이 일에만 집중하는 모습에
나는 한순간에 반해버렸다. 작가라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운 파란 작업복마저도 찡하게 다가왔다. 나 안진옥(44)과 한국 전통문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캔버스와 분청사기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는 서양화가 권순익(45)은 그렇게 첫 대면을 했다.

내가 배운 것을 저 사람과 합치면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다. 암 투병 끝에 마지막 길을 가시면서도 당신의 마지막 소원이 딸의 결혼이라 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의 얼굴 뒤로 어른거렸다. 어머니가 나를 그의 곁으로 이끈 것만 같았다. 딸기코에 얼굴이 빨개지면서 어렵게 말을 꺼내는 모습이 오히려 다정스러웠다. 군 제대 후 어렵게 대학에 입학,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만 했던 그는 추운 겨울에도 학교 작업실 한 귀퉁이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면서 코에 동상이 걸렸다. 처음엔 딸기코가 술을 많이 먹어 그런 줄 알고 오해를 했다. 추위로 코의 실핏줄이 터져 빨간코가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로 돌아간 나는 2002년 월드컵기간 중에 상암동 월드컵공원에서 펼쳐진 깃발축제에 중남미 지역 기획자를 맡으면서 작품을 출품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작품을 보면서 이 사람은 내가 도와주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가 말수는 적지만 오히려 작품에 자신을 표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구 귀국을 결심했다. 경기도 고양시 중남미문화원 기획자(큐레이터)로 일하며 그와 교제했다. 그는 나에게 눈빛만 봐도 좋은 사람이었다. 얼마 후 그와 나는 서울 상도초등학교 동창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만남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가난한 화가라는 이유로 가족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고작 그러려고 외국까지 가서 힘든 공부까지 했냐며,차라리 아르헤티나로 돌아가라 했다. 오빠는 “어떤 동생인데 감히 니가”라며 그의 따귀까지 때렸다. 가난이 죄였다. 하지만 그와 나의 결혼은 막지 못했다.

어느덧 결혼 생활 2년이 흘렀다. 가족들과 친구들도 이젠 그의 사람 좋음에 결혼 잘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가 화가 아내로서의 ‘직분’을 시작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한국 화가들은 화랑이나 컬렉터에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것을 가장 힘들어 한다. 누군가는 해줘야 한다. 큐레이터나 부인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한국 작가들은 작품 파는 일에 서투르고 부끄러움까지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화가의 아내는 작가의 매니저가 돼야 한다.

작가에게 작품에 대한 철학이 있듯이 아내들에게도 삶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귀한 삶’에 대한 적극적 후원자라는 자부심이 필요하다. “아이 우유값 없다”며 남편을 어렵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한다. 미술학원 등 돈벌이로 내몰아 붓을 놓게 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런 이야기가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 치부해도 좋다. 어쩌면 아내들은 돈보다도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더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작품세계에만 갇힌 남편을 곁에서 외롭게 지켜보는 일는 아내들에겐 형벌이다.

주변에 화가들이 가난을 이기지 못해 부부가 헤어지는 것을 많이 본다. 처음엔 예술가라는 매력에 이끌렸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경제적 곤란을 버티지 못한다. 남편들은 대부분 가난을 술과 친구로 풀어버리니 아내들과와 겉돌 수밖에 없다.
‘남과 다른 삶’을 결심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렵다. 화가는 열심히 해도 50대나 돼야 겨우 이름을 알릴 수 있다. 그런 긴 여정을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은 서로를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하고 대화하는 일이다.

나의 반쪽 권순익은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유명해지기보다 한 길을 꾸준히 가고 싶다고.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아내인 내가 바라는 일이기에.

하루 일과를 끝내고 작업실 인근 개천길을 부부가 손잡고 1시간 남짓 거닐며 그날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힘든데 늘 도와줘서 고맙다는 남편의 말 한마디에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흔히들 주변에 아는 화가 한 사람이 있으면 피곤하다고들 한다. 도와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어서다.그렇다고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전시회가 열리면 적극적으로 도록을 들고 다니며 알린다. 문화 접촉 기회를 준다는 당당함에서다. 친척은 물론 친구들에게 억지를 써서라도 전시장에 나오게 만든다.

결혼 후 내가 가장 황당했던 일이 하나 있다. 은행대출을 받으려니 화가는 무직이라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세대주가 되어 겨우 돈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사고를 당해도 화가는 일용직 보험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앞엔 ‘문화입국’이란 말조차 서글퍼 보였다.

부부란 인생의 산책길을 동행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요즘 남편과 작품세계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한다. 남편은 자신의 작품세계에 나를 초대한다. 작가들에겐 아내가 갖고 싶어하는 그림을 그리면 잘 팔린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부인이 가장 객관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기꺼이 남편의 작품으로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올 초 중남미미술 전문 갤러리 ‘베아르떼’를 연 것도 내가 배운 것을 활용하고 남편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다. 어느 원로 화가가 결혼 할 당시 아내 될 사람에게 “자기를 사랑해서 결혼하지 말고 자기 그림을 사랑해서 결혼해야 한다”고 조건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이제는 이해가 간다. 화가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덧붙여 작품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인내의 시간을 부부가 함께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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